기생충, 괴물 같은 세계관에 잡아먹힌 인물들 (스포) 일기

기생충을 보고나서 느낀 것은 영화가 잘 짜인 방정식 같다는 것이었다. 황금종려상 수상이라고 해서 너무 많은 기대를 한 탓인지, 영화를 보고 나서는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딘가 마음이 허전했다. 내내 머리는 열심히 굴렸는데, 감정 이입할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신파가 섞인 것이 내 취향인가 보다.

기생충은 설국열차(꼬리칸-엔진실)와 마찬가지로 세계관이 잘 짜여 있다. 단순하고 투박한 세계관은 힘이 세다. 명료한 세계관을 중심으로 영화가 군더더기 없이 전개된다. 이 영화의 탁월한 지점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커다란 세계관이 모든 캐릭터를 일차원적으로 만들어버리는 단점으로도 작용한다. 영화 속에서 각 캐릭터마다의 서사가 거의 없다시피 한 점도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려내지 못하는 요소다.

형식적으로 보면, 영화의 기본 골격은 반지하에 사는 기택 일가와 유명 건축가가 지은 저택에 사는 박사장 일가 사이의 대립 관계다. 거기에 기택 일가가 계획적으로 저택에 기생하기 전부터 몰래 기생하고 있었던 가정부 부부와의 갈등도 더해진다. 첫 번째가 갑을관계라면, 두 번째는 을-을관계다.

기생충에서 갑을관계 묘사가 세련된 점은, 갑인 박사장 가족이 결코 타자화되어 묘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장면 장면에서 그들을 향한 건조하게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박사장 가족이 가진 자이자 갑에 해당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혐오하거나 적대할만한 구석이 없다. 기택을 운전기사로 채용하기 전 커피잔을 들고 드라이빙 승차감 테스트를 하는 등 까탈스럽긴 하지만, '코너링이 좋다(우병우)'고 하면서 유머있는 모습도 보인다. 기택네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는 걸 '혐오'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건 그냥 차이를 인식하는데서 오는 이질감에 다름 아니다. 이들은 시종일관 상식적이며,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예의도 갖췄다. 박사장 가족은 극복하거나, 물리쳐야할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악의가 없는는데도 적대관계가 빚어진다는 점이다. 관계는 사람에게서 결정되지 않는다. 관계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와 무관하게, 그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수석'처럼 말이다.

이야기에서 사실 갑을 관계가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박사장 가족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동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을의 행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만 존재한다. 이야기의 갈등을 일으키고, 이끌어나가는 요소는 을을 관계에서의 욕망의 대립이다. 박터지는 싸움은 을을 관계에서 시작한다. 서로 대립하는 와중에도, 기세를 잡은 가정부가 기택 가족을 벌씌우면서 북한 말투로 풍자하는 장면에서는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함께 구렁텅이에 빠진 자들 사이의 동지적 감정을 공유하는 것' 같은 것도 느껴졌다. 하지만 함께 저택에 기생하는 방법도 찾을 수 있었을까? 연대해서 박사장네를 물리쳐야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나 연대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 중 하나가 이 어디쯤 있을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이 질문을 영화의 특정 요소와 연관 지어서 생각할 만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허전한 마음이 드는 두 번째 이유는, 명료한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방정식의 실마리는 '저택'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이야기는 죽고 죽이는 파국으로 향하는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은 저택밖에 없다. 기택 일가의 반지하 방은 저택에서 또 다른 을인 가정부를 죽이고 난 다음 물난리로 망가진다. 빚쟁이를 피해 저택에서 기생하던 가정부의 남편은 기택의 가족을 죽이고, 기택은 박사장을 죽인다. 저택은 외국인에게 팔려 간다. 박사장 또한 저택의 손님에 불과했다. 외국인에게 팔린 저택에 기생하는 이는 가정부 남편에서 기택으로 바뀐다. 기택의 아들은 여전히 반지하에서 살면서, 돈을 많이 벌어 저택에 다시 돌아가겠다는 꿈을 꾸지만, 영화는 거기서 끝나버린다. 이해력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이 때문에 '계급과 계층에 관한 비극적 단면' 정도로밖에 영화가 정리되지 않는다. 

내가 만약 서양 사람이었다면, 영화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스타일(오리엔탈리즘)에 취했을 것 같다. 반지하 방 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라는 요소도 좋았다. 빈곤의 냄새는 감각적이고 현실적이니까. 그리고 저택을 향한 욕망과 그 욕망이 몰고 오는 파멸도 좋았다. 나는 파멸과 디스토피아가 모든 좋은 작품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이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아쉬운 이야기였다. 

환부 일기

며칠 전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불현듯 이질감이 들었다. 자주 가는 맥주집의 수제맥주가 한잔 씩 놓여있고 자주 보는 사람들과의 특별할 것 없는 대화를 하던 중이었다. 화제가 그 자리에 있는 공직자 A의 집안 이야기로 흘렀다. 유복하게 자라 아쉬울 것 없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고 어쩌다 그의 다이아몬드 클래스 신용카드 이야기도 나왔고 나는 장난처럼 그 카드를 내 지갑에 꽂았다.

대화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문득 어떤 것이 아물지 않은 환부를 건드린다는 느낌이 들어 그 느낌에 혼자 빠져들었다. 어쩌다 섞인 술자리지만 그 자리가 나에게 이질적이라는 느낌이 든 것이다. 거기 둘러 앉은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들이면서도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자리가 끝난 다음에는 따뜻하고 아늑한 집으로 저마다 돌아갈 것인데 내가 돌아갈 곳은 또 하나의 전선이다. 다이아몬드 클래스 카드 때문에 대출이자를 다 갚지 못해 신용카드 발급도 받지 못하는 허우적대는 전선을 떠올렸다. 그 자리에서는 금리 인상 때문에 파산하지는 않을까, 우울증을 앓는 가족 때문에 위태롭다는 등의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싶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무리 속에서 자의식에 빠져드는 것은 좋지 못한 버릇이지만, 한번 시작하면 빠져나오기 힘든 개미지옥이다. 마음이 여유롭지 못하거나 겉돌 때는 대화에서도 겉돌게 된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겉도는 나를 의식하면서 무슨 말이라도 끼어들고자 말참견을 했다. 때마침 노인들의 청소년 선거권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고 나는 같은 논리라면 치매 노인도 선거권을 박탈해야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뱉으면서 나는 마음을 칼로 쑤시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우리 할머니를 내가 희화화했구나. 대화에 끼고 싶어서 나를 갉아 먹는 말을 했다.

그 이후 며칠 동안 씁쓸한 뒷맛에 침잠했다. 나에 대해서 자책은 좀 안 하고 싶은데, 시시콜콜한 것에 대해서도 자책하게 된다. 마음에는 여유가 없어지고, 딱딱하게 굳는다. 

방송은 나를 어필하는 것이다. 오늘은 내 몫의 시간을 만들지 못했다.

방송 이후 식사에서도 내 몫이 없었다. 나를 어필하기 미안했다.

주절주절 글을 쓰다가 다시 짜증이 난다. 나의 생각에 대해 혼자 곱씹는 것이 뭔가 손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버릇처럼 따져보게 된다.

먹는 행위에는 어딘가 슬픈 면모가 있다.

내 몫의 먹을 것이 있으면 좋겠다.

그걸 내가 확보하는 것이 싫다. 그건 내 옹졸한 모습을 자꾸 상기시킨다. 그냥 다 싫다. 이런 낭비를 자꾸만 하는 내가 싫다. 내까짓게 뭐라고 신줏단지 모시듯 어루고 있을까. 그냥 확 깨져버려라.

일기 일기

처음에는 실수로 시작하였다.

어두운 바에 앉아 있다가 화장실 가는 길에 찰스부코스키의 소설을 처음 손에 잡았다
그의 소설은 읽어 본 적 없으나 그 이름에서 위스키 냄새만 맡았던 적 있다

어제는 책을 골랐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서로 다른 번역본 두 권이 있었다. 중언부언 하는 번역본 대신 내가 집은 번역본의 첫구절


나는 병자다. 나는 악인이다. 나는 매력없는 사람이다.

도스토는 왜 영문모를 병렬을 즐겨하는가

여하는 저 문구가 나를 건드렸고 책을 집었다

책 읽을 여유가 있지는 않다 다만 나는 욕심이 있을 뿐이다

내가 알지 못했던 것

나의 미련으로 나의 아둔함으로 세월을 흘려보내면서 내가 겪을 수도 있었던 수많은 아픔과 기쁨에 대한 그리움 아쉬움 환상과 갈망

어떤 것이 내가 고수해야할 가치일까

나는 욕망을 가지고 저울질하는 사람
하지만 티는 내지 않는다면


나는 거짓인가
나의 마음은 거짓인가

영문모를 삶
영문모를 고통


피곤 일기

일 하려고 카페에 앉았는데 아무래도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피곤하다. 모든 것이

살고싶다 일기

집에와서 고양이를 붙들고 펑펑 울었다. 머릿속에서 맥박 소리가 너무 크고 어지러워서 암울한 생각만 들고 무섭다. 반신마비증세가 찾아오면 병세가 더욱 악화된 것이 분명하다며 더욱 불안해진다. 비틀거리며 삐걱대며 걸어왔던 인생 지금은 더없이 흔들리고 있다. 두려움이 나를 좀먹는다. 일기장에 하소연을 하는 이유는 내 상태를 이야기 할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 하는 것으로 내 마음이 위로가 되기는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다. 듣는 사람의 마음마저 고갈시키는 이것은. 왜 나에게 찾아왔나.
죽음.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지근거리에 두고 살다보면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들 때도 있다. 고마 죽어버려라. 그런데 마지막까지 걸리는 것은 나의 어머니다. 죽어서 어머니의 마음에 대못을 박고싶지 않다. 그것이 내 간절한 소망이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어떤 것도 나에게 의미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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