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일기

아침부터 대청소를 했다. 뉴스를 보는데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대법원에서 직고용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렸고 박근혜. 이재용 판결도 의심스럽던 분위기와 달리 원칙대로 나왔다.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진 것이 체감이 되는데 나는 그 이야기에 자꾸 눈물이 난다.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당신이 사는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진 것 같아서 기쁘고.

8월 28일 일기

886일. 이별이 사별보다도 아플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밤이다. 손을 뻗으면 다시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세상에 살고 있고, 넘기 어려운 벽이 가로막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만 먹는다면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지금껏 수없이 벽을 넘어 왔다.

이제는 그만해야 겠다고 생각한 것은 왜일까. 의지가 약해져서일까. 상대의 마음 때문일까. 뒤늦게 이성적인 판단을 했기 때문인가. 그 판단을 제쳐둘만큼의 감정이 없는 것일까.

안녕의 인사를 전하기까지 내가 생각했던 것은, 그제야 느끼는 바, 상황을 바꿀 가능성은 모든 것을 뒤엎어버릴 때 조금이라도 생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그 언젠가 그가 들려줬던 노래를 다시 듣고 싶어서 가슴이 찢어진다. 소싯적 밴드를 하며 만들었던 그 노래, 안녕, 안녕, 안녕

라가불린 일기

나의 세상은 도전괴 기회, 성취와 기쁨이 가득한 곳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기다림과 아무것도 아닌 기다림과,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만남과 아쉬움, 충족되지 않는 망상과 욕심. 욕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만의 숙연함.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을 나만의 숙연함으로 처음 본 나의 동지인 당신의 안녕을 비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세상입니다. 괜찮습니다. 안녕하시오 당신.


뤼미에르 피플 일기

어쩌다 손에 잡힌 장강명의 -우리의 소원은 전쟁-을 처음 읽고 중고서점에 올라오는 장강명의 소설은 전부 사서 보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표백, 그리고 뤼미에르 피플이 전부이긴 하다. 

그의 작품은 문체가 간결하다. 복잡한 내면의 기술보다는 시원하게 사건을 서술한다. 거기에 소설로 읽을 수밖에 없는 극적 장치가 있다. 극적 장치는 현실에 기반해있기 때문에, 역으로 극적 장치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고, 그것이 장강명 작품의 백미다.

어딘가 도식적이고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아무렴 읽는 사람으로서 티없는 감동을 기대한 것은 아니니까.

-우리의 소원은 전쟁-은 읽은지 오래 되었지만, 정리철이라는 특유의 캐릭터가 매력적이었고, 통일 이후 한반도에 대한 디스토피아적인 상상이 작품의 세계관을 튼튼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과 색채가 비슷한 작품이었다.

-표백-은 상을 받고 싶어서 쓴 소설 같았다. 실제로 한겨레 문학상을 받기는 했다. 내가 만약 소설을 쓴다면 나역시 상을 받거나, 돈을 벌 수 있는 작품을 쓸 거다. 여튼 자살 선언으로 체계를 뒤흔들어버리고 싶었던 세연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이었다. 모든 의미가 퇴색되고 어떤 변혁의 시도도 꿈꿀 수 없는 세상에서 '자살 선언'을 꿈꾼다는 발상 또한 아주 기발했다. 세계관을 관통하는 기발한 아이디어에, 행위로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매력적인 캐릭터. 마치 빨간 약, 파란 약을 순서대로 뿌리면 살이 차오르고 숨이 튼다는 동화처럼(대충 그런 느낌의 동화가 있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나도 하나쯤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든달까.

-뤼미에르 피플-은 내가 딱히 좋아하지 않는 단편 형식이라서, 단숨에 읽지는 못했다. (사족이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책은 단편 형식인 오쿠다 히데오의 라라피포이다) 하지만 책장을 덮으며 느낀 것은 머리로는 잘 정리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중심 인물이 없이, 서울 어딘가의 한 원룸(오피스텔?) 건물 입주자들의 이야기를 연쇄적으로 펼치며 어떤 상상력, 이미지 같은 것을 툭 던져 준다. 오랜 시간을 들여 읽느라 캐릭터가 뒤섞여 있다. 하지만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드는 일관된 감정은 비장함에 가까운 어떤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 같은 비장함이 아니다. 그렇게 거대한 것은 이 작품에 없다. 되게 하찮은 숙명 같은 걸 마음에 품고, 숙명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는 나의 하찮은 숙명을 잘 알고있기 때문에, 그 캐릭터들이 매력적이다.

화자로 박쥐 인간이 나오고, 반인 반서가 나오고, 길고양이가 나오고, 초능력자가 나오는 점은 사실 난잡하기까지 하다. 난잡한 화자들의 이야기는 각자 단편적 이야기이면서, 뤼미에르 빌딩(원룸)을 무대로 하나의 세계를 명징하게 직조한다. 그러한 짜임새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그 세계관 자체가 특별히 매력적이지는 않다. 뭔가 미세먼지 냄새가 난달까.

다만 감정을 건드리는 부분은, 단편이 끝났는데도 단편 마다 나오는 화자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점이다. 예고편만 보고 본편은 못본 것 같은 느낌과 다르다. 박쥐 인간, 반인 반서가 지금도 살아있고,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알 수 없는 나의 동지들을 만난 듯, 위로, 혹은 응원을 받은 느낌인가? 여하튼 무엇인가 있다. 어설프고 하찮은 나의 동지들, 하찮게 각자 숙명대로 잘 살아 보자고요.

기생충, 괴물 같은 세계관에 잡아먹힌 인물들 (스포) 일기

기생충을 보고나서 느낀 것은 영화가 잘 짜인 방정식 같다는 것이었다. 황금종려상 수상이라고 해서 너무 많은 기대를 한 탓인지, 영화를 보고 나서는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딘가 마음이 허전했다. 내내 머리는 열심히 굴렸는데, 감정 이입할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신파가 섞인 것이 내 취향인가 보다.

기생충은 설국열차(꼬리칸-엔진실)와 마찬가지로 세계관이 잘 짜여 있다. 단순하고 투박한 세계관은 힘이 세다. 명료한 세계관을 중심으로 영화가 군더더기 없이 전개된다. 이 영화의 탁월한 지점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커다란 세계관이 모든 캐릭터를 일차원적으로 만들어버리는 단점으로도 작용한다. 영화 속에서 각 캐릭터마다의 서사가 거의 없다시피 한 점도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려내지 못하는 요소다.

형식적으로 보면, 영화의 기본 골격은 반지하에 사는 기택 일가와 유명 건축가가 지은 저택에 사는 박사장 일가 사이의 대립 관계다. 거기에 기택 일가가 계획적으로 저택에 기생하기 전부터 몰래 기생하고 있었던 가정부 부부와의 갈등도 더해진다. 첫 번째가 갑을관계라면, 두 번째는 을-을관계다.

기생충에서 갑을관계 묘사가 세련된 점은, 갑인 박사장 가족이 결코 타자화되어 묘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장면 장면에서 그들을 향한 건조하게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박사장 가족이 가진 자이자 갑에 해당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혐오하거나 적대할만한 구석이 없다. 기택을 운전기사로 채용하기 전 커피잔을 들고 드라이빙 승차감 테스트를 하는 등 까탈스럽긴 하지만, '코너링이 좋다(우병우)'고 하면서 유머있는 모습도 보인다. 기택네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는 걸 '혐오'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건 그냥 차이를 인식하는데서 오는 이질감에 다름 아니다. 이들은 시종일관 상식적이며,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예의도 갖췄다. 박사장 가족은 극복하거나, 물리쳐야할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악의가 없는는데도 적대관계가 빚어진다는 점이다. 관계는 사람에게서 결정되지 않는다. 관계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와 무관하게, 그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수석'처럼 말이다.

이야기에서 사실 갑을 관계가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박사장 가족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동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을의 행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만 존재한다. 이야기의 갈등을 일으키고, 이끌어나가는 요소는 을을 관계에서의 욕망의 대립이다. 박터지는 싸움은 을을 관계에서 시작한다. 서로 대립하는 와중에도, 기세를 잡은 가정부가 기택 가족을 벌씌우면서 북한 말투로 풍자하는 장면에서는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함께 구렁텅이에 빠진 자들 사이의 동지적 감정을 공유하는 것' 같은 것도 느껴졌다. 하지만 함께 저택에 기생하는 방법도 찾을 수 있었을까? 연대해서 박사장네를 물리쳐야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나 연대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 중 하나가 이 어디쯤 있을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이 질문을 영화의 특정 요소와 연관 지어서 생각할 만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허전한 마음이 드는 두 번째 이유는, 명료한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방정식의 실마리는 '저택'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이야기는 죽고 죽이는 파국으로 향하는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은 저택밖에 없다. 기택 일가의 반지하 방은 저택에서 또 다른 을인 가정부를 죽이고 난 다음 물난리로 망가진다. 빚쟁이를 피해 저택에서 기생하던 가정부의 남편은 기택의 가족을 죽이고, 기택은 박사장을 죽인다. 저택은 외국인에게 팔려 간다. 박사장 또한 저택의 손님에 불과했다. 외국인에게 팔린 저택에 기생하는 이는 가정부 남편에서 기택으로 바뀐다. 기택의 아들은 여전히 반지하에서 살면서, 돈을 많이 벌어 저택에 다시 돌아가겠다는 꿈을 꾸지만, 영화는 거기서 끝나버린다. 이해력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이 때문에 '계급과 계층에 관한 비극적 단면' 정도로밖에 영화가 정리되지 않는다. 

내가 만약 서양 사람이었다면, 영화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스타일(오리엔탈리즘)에 취했을 것 같다. 반지하 방 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라는 요소도 좋았다. 빈곤의 냄새는 감각적이고 현실적이니까. 그리고 저택을 향한 욕망과 그 욕망이 몰고 오는 파멸도 좋았다. 나는 파멸과 디스토피아가 모든 좋은 작품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이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아쉬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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