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 일기

내가 저지른 죄를 이해하는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오래 전 지은 죄가 불현듯 이해되고보면 생각한다. 나는 한 사람에게 저지른 잘못으로 평생 대가를 받아야만 한다. 그 대가로 평생 외로움에 허덕이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또 다른 죄 역시 언젠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누군가가 단죄해준다면 좋겠다.

인간실격-다자이 오사무 일기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13p

"아무리 나라도 이런 궁상맞은 여자는..."
손들었다는 듯이 팔짱을 낀 채 쓰네코를 빤히 쳐다보면서 쓴웃음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술을. 돈은 없어."
저는 작은 목소리로 쓰네코한테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들이붓듯이 마시고 싶었습니다. 소위 속물들의 눈으로 보면 쓰네코는 치한의 키스를 받을 가치조차도 없는, 그저 초라하고 궁상맞은 여자였던 것입니다. 의외였지만 뜻밖에도 저는 청천벽력에 박살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전례가 없을 정도로 끝도 없이 술을 마셨고, 어질어질 취해서는 쓰네코와 마주 보며 서글픈 미소를 나눴습니다. 글쎄 듣고 보니 이건 묘하게 지쳐빠진 궁상맞은 여자로군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없는 사람끼리의 동질감 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와서 쓰네코가 사랑스럽고 불쌍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때 적극적으로 미약하나마 사랑의 마음이 싹트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토했습니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그렇게 정신을 잃을 만큼 취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66p

호리키와 나.
서로 경멸하면서 교제하고 서로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그런 것이 이 세상의 소위 '교우'라는 것이라면, 저와 호리키의 관계도 교우였음은 틀림없습니다.
저는 교바시 스탠드바 마담의 의협심에 호소하여 담배 가게의 요시코를 내연의 처로 맞을 수 있었고, 쓰지키의 스미다 강 근처에 있는 목조로 된 작은 2층 건물의 1층에 방을 얻어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술을 끊고 슬슬 제 고정직이 되기 시작한 만화 그리기에 정성을 쏟고, 저녁 식사 후에는 둘이서 영화도 보러 가고 돌아오는 길에는 다방 같은 데 들르기도 하고 또 화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저를 마음속으로부터 믿어주는 어린 신부가 하는 말을 듣고 그 행동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워서, 나도 어쩌면 차차 인간다운 것이 되어서 비참하게 죽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달콤한 생각이 희미하게 가슴속을 훈훈하게 덥혀주기 시작하던 참에 호리키가 다시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106p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언뜻 그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의 그 밑바닥...
-115p


1984 일기

디스토피아 작품을 좋아한다. 희망의 여지를 어설프게 남기는 작품은 딱 그만큼 어설프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냉정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좋다. 영화로 치자면 <아수라>. 그런 점에서 <1984>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디스토피아의 모범이라고 할 만 하다.

책을 읽을 때 겉 표지부터 읽는다. 민음사에서 출판한 <1984> 번역본에는 뒷 표지에 민음사의 책 소개가 나온다. 그걸 읽고 우선 실망했다. 소련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면서 미래에 대해 예언한 소설이라는 문구 때문이다. 조지 오웰을 잘 몰라서 이 소개만 보고 나는 조지 오웰이 있는 집 자식 깨시민쯤 되는 사람인가보다 했다. 최근 읽은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게>에서는 소세키의 예술관이 나오는데, 소세키는 동양 예술의 진가는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을 다룰 때 나타난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고, 이 양반도 노동이라는 때가 묻지 않은 양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식었던 것 처럼.(소세키는 <마음>을 읽고 빠질하기 시작했는데)

오독이었다. 그 밑에 에리히 프롬이 "만약 <1984>를 스탈린주의의 잔학함에 대한 또 하나의 묘사로만 해석하고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 불행한 일"이라고도 써 놨는데 눈여겨 보지 않았다. 책을 덮으며 <1984>는 반 스탈린주의, 반 공산주의적인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전체주의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란 걸 느꼈다.

좋은 작품의 조건은 좋은 세계관이다. 초반부에는 소설의 세계 설정이 좀 도식적이고 단순한 감이 있는데다 장황하게 느껴져 대충 읽어 넘겼다. 조지 오웰도 평가절상됐네 하면서.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단순하게 느낀 설정들이 사실은 투박하지만 아주 뿌리 깊고 단단한 설정이라는 걸 느꼈다. 형식적으로 두 가지 인상깊었던 점은 작품 중간에 논문 형식과 동일한 (제목-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 단락을 액자형식으로 배치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 소설 배경이자 가상의 세계인 오세아니아의 정치, 사회, 군사, 경제적 상황 등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이 부분부터 좀더 집중이 잘 됐는데, 논문 단락이 소설의 세계관을 아주 풍부하고 짜임새있게, 입체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세계관을 직설적으로 설명하는 거긴 한데, 이야기 흐름상 자연스러웠다.

이어지는 장의 주요 장면은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을 고문하면서 대화하는 장면이다. 이 부분에서 어설프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도 높은 디스토피아가 탄생했다. 통제 사회에서 밀회를 즐기고 불온한 꿈을 꾸던 윈스턴은 밀회 상대인 줄리아와 처음 만나던 당시, 이렇게 말한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사람의 속마음까지 지배할 수는 없지. 만약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비록 대단한 성과를 얻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을 패배시키는 셈은 되는 거야"

정말 저 말대로 소설에서 '그들'의 패배에 대한 여지를 남겼다면 어설픈 작품이 됐을 것이다. 권력과 폭력이 지배하지 못하는 사랑이 바로 인간의 정수다!- 라는 식으로. 하지만 소설에서는 그것마저 짓밟는다. 윈스턴은 모진 고문에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고, 고문으로 모든 것이 파탄났지만 자기가 지킨 가장 소중한 것이 아직 남아 있는 걸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것은 잠꼬대로 '줄리아'를 크게 외친 것에서 드러난다. 오브라이언은 이 '마지막으로 남은 소중한 것'이 드러나기를 기다렸고, 곧바로 마지막 단계의 고문을 시작한다. 원초적 공포를 자극하는 마지막 고문 단계에서 윈스턴은 그 고문과 자기 사이에 밀어 넣을 마지막 사람이 있다고 깨닫고 이렇게 외친다. "줄리아 한테 하세요!" 이 말이 나오자 고문은 끝나고 수용소에서도 석방한다. 윈스턴의 위험요소는 모두 제거 됐다. 줄리아도 윈스턴을 배신했다. 석방된 곳에서 다시 만난 둘은 이제 과거와 같은 사람이 아니며, 돌아갈 수도 없다는 걸 알고 헤어진다. 사회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사람으로서 살아간다. <1984>가 정치 체제나 사회 비판에 많이 인용되지만,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 보이는 인간의 존재론적 딜레마? 혹은 인간성을 극한까지 추방해버리는 부분이 백미라고 느낀다.

<1984>를 읽으며 앞서 서평을 남긴 이리가레의 <사랑의 길>이 계속 떠올랐다. 빅브라더의 세계가 동일성을 강요하고 차이는 모두 제거해버리는 사회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리가레가 타자에게 다가서기 위해 환원불가능한 차이를 먼저 인식하고, 타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말'의 중요성에 이야기하는데 <1984>의 세계는 '다가섬'이라는 행위의 대척점에 있는 동일성을 강요하는 세계라는 점이다.

오세아니아 정부 기록국(날조를 위한)에서 일 하는 윈스턴의 기사를 오브라이언이 언급하는 대목이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의 기사에서 없어진 낱말이 사용됐다고 지적하면서(정부는 불온한 생각이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의미의 단어를 단순화하고 하나의 단어로 표준화한다) 신어 사전(표준화된 말) 최신판을 참고해야 한다고 한다. 이 사전은 "동사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언급한다. 이리가레는 의미가 닫힌 단어로서 명사가 아닌, 의미가 열린 '동사'에 다가섬을 위한 말하기의 중요성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의 길>은 하이데거 비판도 담고 있는데, 하이데거 존재론을 알았다면 좀더 정밀한 해석을 했을 것 같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개념대로, <1984>의 오세아니아 정부는 불온한 존재를 사전에 모두 제거해버리기 위해 신어(뉴스피크)를 만들고 통일한다.

<1984>가 흥한 이유는 당시 이데올로기 전쟁에 활용된 부분도 있겠지만, 그런 맥락을 차치하더라도 굉장히 좋은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탄탄한 세계관. 그리고 자연스럽게 세계관을 제시하는 기법을 기록에 남겨둔다.

뤼스 이리가레- 사랑의 길 일기

좋은 문학 작품은 대체로 입체적인 세계관이 바탕된 것이더라. 문학과 문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가면서 나의 세계관도 갖고싶다는 욕심이 들기 시작했다. 더불어, 철학이 교실 안 지적 유흥이 아니고 현실의 갈등 속에서 드러나는 현장을 보고 나서, 나의 시각을 다듬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취향에 맞는 철학자를 꼽고 그의 사유에 꼽사리 끼는 것. 그래서 꼽사리 낄 철학자를 찾고 있다. 추천 받는다. 최근(은 작년) 읽은 건 고병권의 책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니체를 읽고 나서는 딱히 공부해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고는 하지만, 니체는 인간이 욕망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나귀'에서, 부정되는 욕망(노예도덕)을 부단히 긍정하고 자기를 긍정(디오니소스처럼)하며 주인도덕을 펼치는 위버멘쉬(초인)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고 그게 별로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숨쉬는 것만으로 피곤하니까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인생의 어떤 순간에서 참고할 수는 있겠구나, 사회의 어떤 현상을 해석하는 도구 정도로만 여기기로 했다.

그 다음으로 읽은 책이 뤼스 이리가레의 책 '사랑의 길'이다. 마지막 장을 덮기 전까지 줄곧 이리가레가 굉장히 소박한, 혹은 처세술 정도로 여길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페미니즘 이론가'로 불리는 걸 들었는데도 '여기에 무슨 페미니즘이 있지?'라는 느낌도 들었다.

책의 핵심 키워드는 '환원불가능한 차이'이다. 나와 타자는 환원불가능한 차이로 구분되고, 이 차이의 공간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 공간에서 나와 타자가 서로를 존중하고 어루만지면 어느 순간 어느 한 쪽의 지배나 동일성의 강요가 아닌 새로운 관계가 잠시 '현성'된다는 것이다. 세상이 어떤 하나의 가치(예를들어 남성적 가치)로 정렬되며 나와 타자에게 그 가치를 강요(전유)하는 것이 현실인데, 여기서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어루만지는 길(사랑의 길)은 새로운 관계를 여는 시작이 된다는 뜻이다. 얼핏 들으면 한 마디로 "남을 존중하자"라고 퉁칠 수 있는 교훈 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도 '처세술'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던 것이다. 내가 조금이나마 공부했던 철학에서는 세상을 해석(서양 고대 철학에서 시작해 반복되는 뼈대 유물론-관념론)하는 가설과 검증의 구조로 제시됐는데, 사랑의 길에서는 '(남성적)동일성', '전유'라는 개념 외에는 지금 세상을 해석하는 별다른 중심 개념을 제시하지는 않아서 더욱 의구심이 들었다.

...이 책은 특히 어떤 식의 언어 사용을 통해 우리 사이의 사랑의 실천으로 존재할 수 있거나 존재해야할 것을 예견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우리 사이의 사랑의 지혜를 준비하는 것인데, 이 영역은 서구철학이 스스로를 정의해 왔던 바의 지혜, 특히 정신적 지혜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만큼 핵심적인 영역이다. 이 책은 다른 철학, 어떤 면에서는 여성적인 철학을 그려낼 텐데, 그 철학은 상호 주관성과 차이의 대화가 지니는 가치, 구체적이며 감각할 수 있는 측면의 현재적 삶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지혜의 차원으로 끌어올릴 것이다...아직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지혜를 사유하고 구성할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인간 자신을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한 상태에 놓아두기 때문에 자연상태에서나 지니는 편이 좋다고 여겼던 인간의 바로 그 부분에서 시작하는 철학.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두 부분이 갖는 관계의 원래 자리를 일구어야 한다. 그 일이 우리가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이고, <사랑의 길>은 그것이 가능해질 배경을 그려 보인다....<사랑의 길>은 타자에게 다가가는 법, 우리 안의 타자와 우리 사이의 타자와 함께할 가까움의 장소를 마련하는 법을 제안한다...-서문 중 발췌

'처세술 혐의'는 사라질 거다. 개인의 행동요령 정도의 의미는 넘어설 것이고, 아마 이런 식이지 않을까. 나와 타자의 차이를 들여다보는 것은 단지 개인 간의 바람직한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의 범주로 적용 대상이 확대되는 거라고.

이리가레는 타자와의 환원불가능한 차이를 어루만질 수 있는 것은 '말하기'을 통해 가능하다고 한다. 독백, 연설과 달리 서로 간의 대화에서 말하기는 특정한 상황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면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말하기는 책에서 여러차례 강조되는데, 이리가레는 영어의 문장구조를 분석하며 영어가 명사, 주어 중심의 언어로서 타자를 대상화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며 여기서 동사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고도 설명한다.명사나 단어는 이미 사회 속에서 보편적, 동일성이라는 형식에 맞추기 위해 이미 의미가 '닫혔'다. 그런 의미는 이미 "유언과 같은 유산이므로 함께 소통하지 않은 채 전수"된다.

교환이 있으려면 타자가 우리와 접촉하는 것이 핵심이다. 특히 말로써. 하지만 우리는 가까움을 뒤섞임이라든지 융합으로 환원해버리는 방식이 아니고는 말로 접촉하는 이러한 방식을 알지 못한다. 타자가 나를 초월해 있음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타자와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그것은, 우리 각각을 우리 자신들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우리가 닿아왔던 그 부분을 번번히 파괴해 버리는 그런 말하기로 여전히 표현될 뿐이다. 우리 존재의 근원 가까이에서 그런 접촉이 이루어졌다면 더욱 그러하다. 초월에 이른다고 주장하는 말이 감성이 박탈된 상태라면 근원에 놓인 타자에, 자아에 기꺼이 있는 상태에서의 타자에 다다를 수 없다. 어루만짐이란 감각적인 것이여야 하며, 가까움을 주변의 것으로 해체하지 않으면서 가까움과 연결되어야 한다. 어루만짐이란 그것에 다다랐다가는 그 결과 다시 그것을 닫고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간격이 주어져야 한다. 이미 드러난 것을 통해 한쪽이 다른 한쪽을 그저 뒤집어엎는 일은 피하면서 우리 각각이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하고 타자를 다시 발견하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것으로서의 간격...
-38p

발화와의 관계에 있어서 많은 이들에게 말하기와 오직 한 사람에게 말하기는 당연히 같은 관계를 전제하지 않는다. 첫 번째 경우 그것은 어느 정도 닫힌 의미를 전달하게 되며, 그 속에서 말하는 주체는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과 발화 자체와 대화를 나눈다.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종류의 의미는 남성적 주체가 항상 우위를 차지했던 분야이다...한편으로 완전하고 닫힌 낱말이 있고, 다른 한 편으로 낱말의 부재가 있을 뿐 그 둘 사이에 어떤 오고감이 없는 이유가, 말이 펼쳐지는 과정에서 타자와의 소통에 대해 질문하지 않음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타자에게는 닫힌 낱말로 의미를 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한 말은 언제나 이미 유언과 같은 유산이므로 함께 소통하지 않은 채 전수된다...보통 낱말들과 다른 참말은 시인의 말하기일 텐데, 시인은 모든 것이 그렇게 표현될 수 없음을 경험함으로써 노래로 옮겨간다...그때부터 참말은 오직 한 사람-말함으로써 길을 트는 니체와 같은 인물-에게 속하지 않고 둘에게 속한다. 각각은 둘 사이에서 생겨나고 펼쳐지는 발화의 일부를 지닌다...대화를 할 때 당연하게 주어져 있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면, 한쪽이나 다른 한쪽의 내밀함을 침해하지 않고 자유로운 공간을 지킴으로써 사이의 친밀함이 생겨나도록 할 수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44p

인용문 중 흥미로운 것은 이리가레도 니체에 대해 한 차례 언급한다는 점이다. 그는 니체의 위버맨쉬를 독백하는 사람 정도로 치부하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느낀다. 이리가레는 한 사람의 독백으로는 서로를 어루만질 수 없다고 한다. 오히려 독백이란 타자를 부정하는 일이다. '동일함'을 강요하는 일이며, 이는 '어루만짐의 순간에 피어날 수 있는 나와 타자의 다양한 형식'을 '마비'시키는 일이다.

타자와의 환원불가능한 차이를 인식하고 서로 어루만지기 위해 다가간다고 해서 '탈전유'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환원불가능한 틈에서 '잔치를 열 수도 있'지만, 결코 '결정적이지는' 않다. 타자에게 갔다가 떨어져 나오기를 '반복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타자와의 동일성으로 환원되는 것에 대한 반대 논의'가 아니라, '완전함에 도달해야 한다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나로부터 시작해서이지만 또한 타자로부터 시작해서 나는 현성한다. 적어도 그러한 존재를 무로 축소하지 않고 그 존재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타자와 관련한 내 행동의 변화는 때로 지금 나의 모습으로 되기 보다는 동일하게 남아있기를 뜻하기도 한다. 분명 내가 동일하고 계속 동일하거나 동일하게 되는 것은 내 자신과의 연속선상에서이지만, 또한 타자가 내게 끼치는 영향 때문이기도 하고 타자와의 관계에 들어서기 위해 내가 같은 언어를 따라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기도 하다. 그때부터 이 동일함은 내 자신의 형식이 피어나지 못하게 하는 가공된 형식처럼 나를 마비시킨다.
-97p

타자와의 관계는 목적을 염두에 두고 수단을 이용함으로써 구축되어서는 안 된다. 타자가 일부분 대표하는 물질적 실재가 그 관계에서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목적에 종속될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여전히 일반적으로 일어난다. 그것이 타자를 재생산의 자리로 환원하는 문제이든, 쾌락의 도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일의 도구로 환원하는 문제이든, 아니면 타자의 되기를 하나의 단일한 주체에 의해 정의된 동일성의 질서에 종속시키는 문제이든 말이다. 각 주체는 타자 앞에 멈추어 서서 타자의 환원불가능한 타자성을 존중해야 한다. 타자의 자라남에 각자가 줄 수 있는 도움은 각자가 애초의 실재에 충실한 한에서 그 실재와 되기에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도움을 주려면 누구나 자신들의 실재에 충실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두 주체 간의 거리와 차이를 유지하게 되므로 주어진 도움이 효과적일 수 있다.
-121p

다가섬은 나와 타자의 환원불가능한 차이를 인식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사실 이를 통해 나로부터 타자에게로 가는 길에 접근할 수 있고 아직 자유로운 에너지와 공간을 공유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다. 어떤 누군가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된 것에서만 가까움은 사태이자 도래로 발생할 수 있다. 나만의 것으로 내게 속하거나 나만의 것으로 타자에게 속하지 않는 어떤 것이 생기한다. 과거에 없었지만 두 세계가 함께 모임으로써 생성된 어떤 것이 도래하여 온다. 이렇게 발생한 것은 각자가 맞아들이고 그 기억을 안전히 지킨다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그저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할 조우의 신비로운 유산으로서 간직하기 위해서.
-157p

타자와 나 사이의 갈라진 틈은 환원불가능하다. 물론 다리도 세울 수 있고 에너지를 집결하여 조우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 수도 있지만, 존재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다음에야 그 결합은 결코 결정적이지 않다. 결합은 자신 안으로 되돌아오는가 하면 멀리 떠나가며 의견을 달리하고 서로 떨어져있는 것을 포함한다. 자신의 되기에 조응하려면 타자에게 다가갔다가 떨어져나오기를 반복해야 한다. 이것을 동일성으로 환원되는 것에 대한 단순한 반대 논의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차이는 자신 안에 있는 것이든 타자와의 관계에서든 완전함을 단념할 것을 요구하며, 그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다거나 도달해야 한다는 환상을 지탱하는 그 무엇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자신과 타자에 대한 성실함은 때로 어떤 다른 것, 영원하기를 바란다든가 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축하하고 기억하는 일이 어울릴만한 그런 조우의 산물을 얻기 위해서는 무매개적인 충만함이라는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161p

이리가레를 페미니즘 이론가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사랑의 길'에서는 앞서 말했듯 페미니즘은 언급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차'라는 개념에서는 남녀의 성을 두 축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남녀 성역할, 혹은 그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추기는 개념처럼 들리기도 한다. 실제로 역자 해설에는 성차 화두로 큰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 논쟁 중에는 '성 정체성을 비롯한 성적 육체의 구성성(젠더를 말하는 듯)', '정치적 동성애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의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역자 해설에는 이에 대한 반론도 나오는데, "이리가레의 저작은 그 자체가 여성적 말하기 가능성에 대한 탐구로, 여성에게 주어진 유일한 담론일 수도 있는 기존의 담론을 여성의 입장에서 이용함으로써 남성중심적 담론이 어떻게 보편성의 이름으로 여성을 배제하는지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것.

책에도 관련한 언급이 나온다. 기존 고정관념의 의미를 남성성, 여성성 개념에서 그대로 차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성성과 여성성은 절대 서로의 역이나 대립물일 수 없다. 서로 다를 뿐(환원불가능한 차이)이다. 둘 사이에서 유지되는 이 차이가 아마도 모든 차이 중에서 가장 사유되기 힘든 것으로서의 차이 그 자체일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최근 나는 한 출입처에서 취재하는 한 기자가 하늘 말에서 설명하기 힘든 문제점을 느꼈다. 그 기자는 여성 공무원 간부 취재를 하며 여성의 리더십 장점에 대한 코멘트를 받으려고 했다. 그러면서 카리스마, 상하관계 등을 언급하며 남성적인 특성이라고 했고, 꼼꼼하고 감정을 살피고 평화로운 특성을 여성적 특성이라고, 이런 리더십이 필요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여기서 남성-여성은 서로 대립되는 특성으로 배열돼 있다. 하지만 이리가레는 차이 그 자체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남성성, 여성성을 활용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 사이에 차이를 가지고 있는 다양한 주체들에게도 차이를 인정하고 어루만짐이 필요하다는, 그리하여 지배나 전유가 아닌, "각자가 자신의 삶을 지키면서 타자의 기여를 환대하는 움직이는 전체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때가 내가 앞서 말했던 단지 처세술이 아니게 되는 지점인 듯 보인다. 다만 아직 명쾌하지는 않다.

남녀의 차이는 이미 존재하므로 우리 지성의 산물로 비유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그것을 사유하고 일구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야하지만 우선 존재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유의 기본적인 등식은 a=a가 아니라 a+b=하나가 될 수 있다. a+a가 아닌 것=전체 라고 쓸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여성성은 남성성이 아닌 것이 되거나 그 역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은 절대 서로의 역이나 대립물일 수 없다. 서로 다를 뿐이다. 그 둘사이에서 유지되는 이 차이가 아마도 모든 차이 중에서 가장 사유되기 힘든 것으로서의 차이 그 자체일 것이다. 사실 그러한 차이는 이미 사고에 의해 구성된 전체 안에서는 발생할 수 없다. 오히려 확실히 그것은 사유해야 할 것의 한 부분으로, 일종의 한계 짓는 효과로 이 전체를 지닌다. 따라서 전체가 제대로 근거지어져 있는 상태로 구성되어 있다는 믿음을 의문시함으로써가 아니라면 그것은 사유할 수 없다...
-115p

책의 막장에는 되풀이 했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설명한다. 글의 제일 끝에 붙인다.

책을 읽고나서, 이리가레의 사유로 해석해 볼 수 있는 현상이 눈에 보였다. 2017년 탄핵 촛불 집회에 함께 했던 이들 중 어떤 청년은 함께 투쟁했던 다른 청년과 한 덩어리로 퉁치는 것이 불쾌하고 잘못됐다고 하는 글을 봤다.페이스북 페이지 '후레자식 연대'에 나온 글이다. 여기서 그는, 집회 당시 가장 환멸을 느꼈던 대상이 박근혜도 아닌 바로 같이 투쟁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저열한 행동이라고 했다.

""씨발년"거리는 개저씨들, 그걸 영웅적 행위라고 생각하는 디제이 디오씨 이하늘. 성추행 일삼는 벌레들" 등등... 또한 블랙리스트를 호소하는 "예술가 양반들이 보여준 저열한 퍼포먼스와 작품"도 지적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갈등을 해소하고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성실하게 관찰하기 위한 장치"라고 주장한다.

차이를 강조하고, 민주주의가 그 차이를 관찰하기 위한 장치(검경)라고 하는 점에서 나는 이리가레의 사유와 맥이 닿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로 때아닌 홍역을 치르고 있는 성주 주민들을 보면서도 느꼈다. 현재 성주 내 사드 반대 투쟁의 방향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 이중 어느 하나의 방향으로 힘을 뭉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에서 다른 쪽의 투쟁에 대해서 잘못됐다고 지적하며 논쟁이 시작됐다. 누가 틀리고 옳다고 이야기할 입장은 못 된다. 이리가레의 사유에 도식적으로 대입하면, 서로 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가가는 '사랑의 길'이 필요하다고 할 것인데, 지금 상황에 완전히 부합하는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어딘지 양비론-훈수-꼰대의 냄새가 나는 듯도 하다. 쩝.

마지막 인용.

미리 조직된 세계의 조화는 자신에 대한 관계나 타자에 대한 관계를 지배할 수 없다. 그런 것이 생겨나려면 존재하지 않게 됨을 감수해야할 것이다. 자기 자신과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이려면 아직 순결한 장소가 필요한데, 그로부터 새로운 현존에서 나오는 말하기를 받아들이고 미래에 그것이 출현할 수 있을 비옥함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통일성과 움직임은 더 이상 동일자 안에서의 합일이 아니라, 차이가 여전히 현존의 조건이자 되기의 원천인 그런 관계로부터 나올 것이다. 과거에는 동일자 안으로의 통합의 문제였지만 이제 문제는 서로 다른 것을 인식하고, 각자가 자신의 삶을 지키면서 타자의 기여를 환대하는 움직이는 전체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고요하면서 동시에 변화해 나가는 것이 조화롭게 함께 작용하여 거주함으로써, 타성이 아닌 자신과 타자에의 충실함이 나타날 것이다. 각자는 상대편에게 한계를 정해주되 어떤 형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형식은 주체성에 고유한 세계로 다시 돌아감으로써 생겨날 것이다. 자신을 부어넣거나 자신을 맞출 틀을 바깥에서 부여하면 자신만의 형식이 피어나는 사태에 값하지 못한다. 그러한 형식의 피어남을 존중하거나 그에 도움이 되는 객관적인 지원이 분명 존재한다...그런데 무슨 연유에서 형식이 흔히 고통을 연상시키면서 그와 관련되어 왔을까? 그것은 오로지 혼자서 세계를 세우고 건설한다고 주장하는 인간의 고독과 직결된 것은 아닐까? 형식이 또한 타자로부터, 그리고 타자에 대해 느끼고 타자가 보여주는 우정으로부터도 생겨난다면 그 형식의 피어남 또한 행복이 아닐까? 완전한 전체가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한계를 받아들이는 일이 꼭 슬픔을 의미하는 걸까? 혹시 그것이 슬픔을 자아내는 이유는 단지 더없는 행복의 망각에 기초한 정신의 허식 때문은 아닐까? 또한 삶에의 충실함의 망각에 기초한. 삶을 지키고 자라나게 하는 일은 비록 규율과 포기를 요구할지라도 행복을 수반하는 것인데 말이다.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 가장 친밀한 것 안으로의 집결을 알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든 밝게 비추는 사랑의 은혜를 알지 못한다. 이는 또한 형이상학이 계발한 것과는 다른 빛의 도움을 받아 자원이 묻힌 장소, 명상적 집결의 장소를 개방한다. 진실로 그것은 제작하는 능력만큼이나 존재하도록 놓아두는 능력을 담고 있다.
-173p

생의 이면-이승우 일기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허5파6 작가의 작품 여중생A에서 이 책이 소개 됐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발견하곤 망설임 없이 샀다.

책은 독해 속도가 느린 내가 이틀에 나눠 읽을 정도로 몰입할 수 있을만큼 흡입력 있다. 결코 눈에 익은 형식으로 작품이 전개되지도 않고, 문체나 내용이 다소 무거워 읽기 쉬운 글은 아닌데도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데 있다. 이 이야기가 소설 속 인물의 이야기이자 작가의 이야기면서, 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로 나는 이 책의 어떤 향취라고 해야 할까, 잔향이라고 해야할까 할만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느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차차 다른사람과 이야기를 통해 좀더 이해해야 한다. 그들과 나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의 콤플렉스는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강박증을 낳았나?
작중 화자 '부길'과 같은 결핍감, "세상이 나 이외의 모든 것의 편"이라는 절망감, 좀더 정확히 말해 타인과의 분리 불안이 있었나. 그것은 그 시절 생에서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했나. 그리고 개인에게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쳤나?
사랑에 서툰 시절 당신의 사랑도 '부길'처럼 나르시즘적이었나? 누구나 처음은 '부길'일 수 있으되 사랑의 기술(에리히프롬-작 중 등장)을 익혀나가는 것일까?

나 스스로는 앞의 몇 개 질문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뒤의 몇 개 질문에는 짧은 순간 사랑의 실패를 통해 경험했다.

비록 내 과거를 볼 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졌다고 말하긴 어려울지라도 얼마간 아버지를 혐오한 적은 있었다. 그보다 내가 부길의 궤적을 걷는 것은 부모에게서 충분한 양분을 제공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을 갈구했고 그 사랑을 신에게서, 또는 신격화 한 내 또래 여자 아이에게서 찾았다. 감히 신은 원망하지 못했으나 (대신 나를 원망했고) 내 사랑의 대상이 된 여자아이는 원망하기 좋았다.

'부길'이 '종단'을 기다리다 '종단'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에 '종단'을 모욕하고 폭행하는 모습과 꼭 같이 나도 그들을 자주 원망했다.

이것은 나만의 경험인가? 아니면 누구나 다 겪는 일이고 거기서 배워나가는 것일까? 나는 지금 이 모습에서 얼마만큼 멀어졌나? 사실 마지막 질문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품 속 시점의 '부길'과 회상되는 '부길' 사이에는 큰 단절이 있다. 현재의 '부길'이 어떤 생각과 태도로 살아가는지, 회상되는 '부길'과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는 이야기 속에서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나아짐' 역시 확인하지 못했다. 그저 욕망과 욕구를 표출하는, 또는 제어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작가의 '문학'에 대한 견해로 볼 때, '부길'이 결국 반성, 늬우침, 용서, 자기 치유 따위를 위한 방책으로 '글쓰기'를 제안했다는 점만 알 수 있다. 관련된 이야기 중 하나다. '부길'이 신학교 기숙 학원에 들어갔을 때 신학도 3명이 있었다. A는 '학문으로서의 신학', B는 '세상 속의 신학', C는 'A와 B를 적당히 절충한 문학으로서의 신학'을 주장하며 토론을 해 나갔다. '부길'은 당시 자기는 이 모두가 아닌 '방관자'라고 생각하는데, 훗날 C에 가까웠다고 회상한다. 자기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세계였던 박제된 '종단'과 그를 통한 '신학'이 당시 '부길'의 가치였다면, '종단'과의 결별로 그 세계가 무너진 후로는 C에 가깝게 된다. 그것은 '부길'이 배운 일종의 '기술'이리라.

나역시 '기술'을 배우며 산다. 내 감정의 요동에 빠져 상대방과 괴리될 수 있음을 배웠다. 내 감정에 몰두하기만 하는 것은 시야를 좁히고 또 오판할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다. 나는 자주 주변 사람들과 앞서 말한 이유로 다퉈왔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결핍', 유년 시절의 '절망', '분리불안' 이러한 것들이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경험이라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따위의 말이 사람의 행동이나 심리를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인 단어가 되었나?

정리된 답은 없으나 잘 잊어버리는 버릇때문에 자기 전에 두서없이 적어 둔다. 이 주제로 누구라도 함께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따로 작성할 계획이다. (아직 제목의 의미를 모르겠다. 표지 디자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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