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일기

디스토피아 작품을 좋아한다. 희망의 여지를 어설프게 남기는 작품은 딱 그만큼 어설프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냉정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좋다. 영화로 치자면 <아수라>. 그런 점에서 <1984>가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디스토피아의 모범이라고 할 만 하다.

책을 읽을 때 겉 표지부터 읽는다. 민음사에서 출판한 <1984> 번역본에는 뒷 표지에 민음사의 책 소개가 나온다. 그걸 읽고 우선 실망했다. 소련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면서 미래에 대해 예언한 소설이라는 문구 때문이다. 조지 오웰을 잘 몰라서 이 소개만 보고 나는 조지 오웰이 있는 집 자식 깨시민쯤 되는 사람인가보다 했다. 최근 읽은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게>에서는 소세키의 예술관이 나오는데, 소세키는 동양 예술의 진가는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을 다룰 때 나타난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고, 이 양반도 노동이라는 때가 묻지 않은 양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식었던 것 처럼.(소세키는 <마음>을 읽고 빠질하기 시작했는데)

오독이었다. 그 밑에 에리히 프롬이 "만약 <1984>를 스탈린주의의 잔학함에 대한 또 하나의 묘사로만 해석하고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 불행한 일"이라고도 써 놨는데 눈여겨 보지 않았다. 책을 덮으며 <1984>는 반 스탈린주의, 반 공산주의적인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전체주의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란 걸 느꼈다.

좋은 작품의 조건은 좋은 세계관이다. 초반부에는 소설의 세계 설정이 좀 도식적이고 단순한 감이 있는데다 장황하게 느껴져 대충 읽어 넘겼다. 조지 오웰도 평가절상됐네 하면서.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단순하게 느낀 설정들이 사실은 투박하지만 아주 뿌리 깊고 단단한 설정이라는 걸 느꼈다. 형식적으로 두 가지 인상깊었던 점은 작품 중간에 논문 형식과 동일한 (제목-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 단락을 액자형식으로 배치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 소설 배경이자 가상의 세계인 오세아니아의 정치, 사회, 군사, 경제적 상황 등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이 부분부터 좀더 집중이 잘 됐는데, 논문 단락이 소설의 세계관을 아주 풍부하고 짜임새있게, 입체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세계관을 직설적으로 설명하는 거긴 한데, 이야기 흐름상 자연스러웠다.

이어지는 장의 주요 장면은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을 고문하면서 대화하는 장면이다. 이 부분에서 어설프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도 높은 디스토피아가 탄생했다. 통제 사회에서 밀회를 즐기고 불온한 꿈을 꾸던 윈스턴은 밀회 상대인 줄리아와 처음 만나던 당시, 이렇게 말한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사람의 속마음까지 지배할 수는 없지. 만약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비록 대단한 성과를 얻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을 패배시키는 셈은 되는 거야"

정말 저 말대로 소설에서 '그들'의 패배에 대한 여지를 남겼다면 어설픈 작품이 됐을 것이다. 권력과 폭력이 지배하지 못하는 사랑이 바로 인간의 정수다!- 라는 식으로. 하지만 소설에서는 그것마저 짓밟는다. 윈스턴은 모진 고문에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고, 고문으로 모든 것이 파탄났지만 자기가 지킨 가장 소중한 것이 아직 남아 있는 걸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것은 잠꼬대로 '줄리아'를 크게 외친 것에서 드러난다. 오브라이언은 이 '마지막으로 남은 소중한 것'이 드러나기를 기다렸고, 곧바로 마지막 단계의 고문을 시작한다. 원초적 공포를 자극하는 마지막 고문 단계에서 윈스턴은 그 고문과 자기 사이에 밀어 넣을 마지막 사람이 있다고 깨닫고 이렇게 외친다. "줄리아 한테 하세요!" 이 말이 나오자 고문은 끝나고 수용소에서도 석방한다. 윈스턴의 위험요소는 모두 제거 됐다. 줄리아도 윈스턴을 배신했다. 석방된 곳에서 다시 만난 둘은 이제 과거와 같은 사람이 아니며, 돌아갈 수도 없다는 걸 알고 헤어진다. 사회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사람으로서 살아간다. <1984>가 정치 체제나 사회 비판에 많이 인용되지만,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 보이는 인간의 존재론적 딜레마? 혹은 인간성을 극한까지 추방해버리는 부분이 백미라고 느낀다.

<1984>를 읽으며 앞서 서평을 남긴 이리가레의 <사랑의 길>이 계속 떠올랐다. 빅브라더의 세계가 동일성을 강요하고 차이는 모두 제거해버리는 사회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리가레가 타자에게 다가서기 위해 환원불가능한 차이를 먼저 인식하고, 타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말'의 중요성에 이야기하는데 <1984>의 세계는 '다가섬'이라는 행위의 대척점에 있는 동일성을 강요하는 세계라는 점이다.

오세아니아 정부 기록국(날조를 위한)에서 일 하는 윈스턴의 기사를 오브라이언이 언급하는 대목이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의 기사에서 없어진 낱말이 사용됐다고 지적하면서(정부는 불온한 생각이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의미의 단어를 단순화하고 하나의 단어로 표준화한다) 신어 사전(표준화된 말) 최신판을 참고해야 한다고 한다. 이 사전은 "동사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언급한다. 이리가레는 의미가 닫힌 단어로서 명사가 아닌, 의미가 열린 '동사'에 다가섬을 위한 말하기의 중요성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의 길>은 하이데거 비판도 담고 있는데, 하이데거 존재론을 알았다면 좀더 정밀한 해석을 했을 것 같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개념대로, <1984>의 오세아니아 정부는 불온한 존재를 사전에 모두 제거해버리기 위해 신어(뉴스피크)를 만들고 통일한다.

<1984>가 흥한 이유는 당시 이데올로기 전쟁에 활용된 부분도 있겠지만, 그런 맥락을 차치하더라도 굉장히 좋은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탄탄한 세계관. 그리고 자연스럽게 세계관을 제시하는 기법을 기록에 남겨둔다.

뤼스 이리가레- 사랑의 길 일기

좋은 문학 작품은 대체로 입체적인 세계관이 바탕된 것이더라. 문학과 문학적 글쓰기에 관심이 가면서 나의 세계관도 갖고싶다는 욕심이 들기 시작했다. 더불어, 철학이 교실 안 지적 유흥이 아니고 현실의 갈등 속에서 드러나는 현장을 보고 나서, 나의 시각을 다듬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취향에 맞는 철학자를 꼽고 그의 사유에 꼽사리 끼는 것. 그래서 꼽사리 낄 철학자를 찾고 있다. 추천 받는다. 최근(은 작년) 읽은 건 고병권의 책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니체를 읽고 나서는 딱히 공부해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고는 하지만, 니체는 인간이 욕망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나귀'에서, 부정되는 욕망(노예도덕)을 부단히 긍정하고 자기를 긍정(디오니소스처럼)하며 주인도덕을 펼치는 위버멘쉬(초인)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고 그게 별로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숨쉬는 것만으로 피곤하니까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인생의 어떤 순간에서 참고할 수는 있겠구나, 사회의 어떤 현상을 해석하는 도구 정도로만 여기기로 했다.

그 다음으로 읽은 책이 뤼스 이리가레의 책 '사랑의 길'이다. 마지막 장을 덮기 전까지 줄곧 이리가레가 굉장히 소박한, 혹은 처세술 정도로 여길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페미니즘 이론가'로 불리는 걸 들었는데도 '여기에 무슨 페미니즘이 있지?'라는 느낌도 들었다.

책의 핵심 키워드는 '환원불가능한 차이'이다. 나와 타자는 환원불가능한 차이로 구분되고, 이 차이의 공간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 공간에서 나와 타자가 서로를 존중하고 어루만지면 어느 순간 어느 한 쪽의 지배나 동일성의 강요가 아닌 새로운 관계가 잠시 '현성'된다는 것이다. 세상이 어떤 하나의 가치(예를들어 남성적 가치)로 정렬되며 나와 타자에게 그 가치를 강요(전유)하는 것이 현실인데, 여기서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어루만지는 길(사랑의 길)은 새로운 관계를 여는 시작이 된다는 뜻이다. 얼핏 들으면 한 마디로 "남을 존중하자"라고 퉁칠 수 있는 교훈 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도 '처세술'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던 것이다. 내가 조금이나마 공부했던 철학에서는 세상을 해석(서양 고대 철학에서 시작해 반복되는 뼈대 유물론-관념론)하는 가설과 검증의 구조로 제시됐는데, 사랑의 길에서는 '(남성적)동일성', '전유'라는 개념 외에는 지금 세상을 해석하는 별다른 중심 개념을 제시하지는 않아서 더욱 의구심이 들었다.

...이 책은 특히 어떤 식의 언어 사용을 통해 우리 사이의 사랑의 실천으로 존재할 수 있거나 존재해야할 것을 예견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우리 사이의 사랑의 지혜를 준비하는 것인데, 이 영역은 서구철학이 스스로를 정의해 왔던 바의 지혜, 특히 정신적 지혜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만큼 핵심적인 영역이다. 이 책은 다른 철학, 어떤 면에서는 여성적인 철학을 그려낼 텐데, 그 철학은 상호 주관성과 차이의 대화가 지니는 가치, 구체적이며 감각할 수 있는 측면의 현재적 삶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지혜의 차원으로 끌어올릴 것이다...아직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지혜를 사유하고 구성할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인간 자신을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한 상태에 놓아두기 때문에 자연상태에서나 지니는 편이 좋다고 여겼던 인간의 바로 그 부분에서 시작하는 철학.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두 부분이 갖는 관계의 원래 자리를 일구어야 한다. 그 일이 우리가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이고, <사랑의 길>은 그것이 가능해질 배경을 그려 보인다....<사랑의 길>은 타자에게 다가가는 법, 우리 안의 타자와 우리 사이의 타자와 함께할 가까움의 장소를 마련하는 법을 제안한다...-서문 중 발췌

'처세술 혐의'는 사라질 거다. 개인의 행동요령 정도의 의미는 넘어설 것이고, 아마 이런 식이지 않을까. 나와 타자의 차이를 들여다보는 것은 단지 개인 간의 바람직한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의 범주로 적용 대상이 확대되는 거라고.

이리가레는 타자와의 환원불가능한 차이를 어루만질 수 있는 것은 '말하기'을 통해 가능하다고 한다. 독백, 연설과 달리 서로 간의 대화에서 말하기는 특정한 상황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면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말하기는 책에서 여러차례 강조되는데, 이리가레는 영어의 문장구조를 분석하며 영어가 명사, 주어 중심의 언어로서 타자를 대상화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며 여기서 동사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고도 설명한다.명사나 단어는 이미 사회 속에서 보편적, 동일성이라는 형식에 맞추기 위해 이미 의미가 '닫혔'다. 그런 의미는 이미 "유언과 같은 유산이므로 함께 소통하지 않은 채 전수"된다.

교환이 있으려면 타자가 우리와 접촉하는 것이 핵심이다. 특히 말로써. 하지만 우리는 가까움을 뒤섞임이라든지 융합으로 환원해버리는 방식이 아니고는 말로 접촉하는 이러한 방식을 알지 못한다. 타자가 나를 초월해 있음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타자와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그것은, 우리 각각을 우리 자신들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우리가 닿아왔던 그 부분을 번번히 파괴해 버리는 그런 말하기로 여전히 표현될 뿐이다. 우리 존재의 근원 가까이에서 그런 접촉이 이루어졌다면 더욱 그러하다. 초월에 이른다고 주장하는 말이 감성이 박탈된 상태라면 근원에 놓인 타자에, 자아에 기꺼이 있는 상태에서의 타자에 다다를 수 없다. 어루만짐이란 감각적인 것이여야 하며, 가까움을 주변의 것으로 해체하지 않으면서 가까움과 연결되어야 한다. 어루만짐이란 그것에 다다랐다가는 그 결과 다시 그것을 닫고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간격이 주어져야 한다. 이미 드러난 것을 통해 한쪽이 다른 한쪽을 그저 뒤집어엎는 일은 피하면서 우리 각각이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하고 타자를 다시 발견하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것으로서의 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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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화와의 관계에 있어서 많은 이들에게 말하기와 오직 한 사람에게 말하기는 당연히 같은 관계를 전제하지 않는다. 첫 번째 경우 그것은 어느 정도 닫힌 의미를 전달하게 되며, 그 속에서 말하는 주체는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과 발화 자체와 대화를 나눈다.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종류의 의미는 남성적 주체가 항상 우위를 차지했던 분야이다...한편으로 완전하고 닫힌 낱말이 있고, 다른 한 편으로 낱말의 부재가 있을 뿐 그 둘 사이에 어떤 오고감이 없는 이유가, 말이 펼쳐지는 과정에서 타자와의 소통에 대해 질문하지 않음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타자에게는 닫힌 낱말로 의미를 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한 말은 언제나 이미 유언과 같은 유산이므로 함께 소통하지 않은 채 전수된다...보통 낱말들과 다른 참말은 시인의 말하기일 텐데, 시인은 모든 것이 그렇게 표현될 수 없음을 경험함으로써 노래로 옮겨간다...그때부터 참말은 오직 한 사람-말함으로써 길을 트는 니체와 같은 인물-에게 속하지 않고 둘에게 속한다. 각각은 둘 사이에서 생겨나고 펼쳐지는 발화의 일부를 지닌다...대화를 할 때 당연하게 주어져 있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면, 한쪽이나 다른 한쪽의 내밀함을 침해하지 않고 자유로운 공간을 지킴으로써 사이의 친밀함이 생겨나도록 할 수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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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중 흥미로운 것은 이리가레도 니체에 대해 한 차례 언급한다는 점이다. 그는 니체의 위버맨쉬를 독백하는 사람 정도로 치부하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느낀다. 이리가레는 한 사람의 독백으로는 서로를 어루만질 수 없다고 한다. 오히려 독백이란 타자를 부정하는 일이다. '동일함'을 강요하는 일이며, 이는 '어루만짐의 순간에 피어날 수 있는 나와 타자의 다양한 형식'을 '마비'시키는 일이다.

타자와의 환원불가능한 차이를 인식하고 서로 어루만지기 위해 다가간다고 해서 '탈전유'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환원불가능한 틈에서 '잔치를 열 수도 있'지만, 결코 '결정적이지는' 않다. 타자에게 갔다가 떨어져 나오기를 '반복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타자와의 동일성으로 환원되는 것에 대한 반대 논의'가 아니라, '완전함에 도달해야 한다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나로부터 시작해서이지만 또한 타자로부터 시작해서 나는 현성한다. 적어도 그러한 존재를 무로 축소하지 않고 그 존재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타자와 관련한 내 행동의 변화는 때로 지금 나의 모습으로 되기 보다는 동일하게 남아있기를 뜻하기도 한다. 분명 내가 동일하고 계속 동일하거나 동일하게 되는 것은 내 자신과의 연속선상에서이지만, 또한 타자가 내게 끼치는 영향 때문이기도 하고 타자와의 관계에 들어서기 위해 내가 같은 언어를 따라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기도 하다. 그때부터 이 동일함은 내 자신의 형식이 피어나지 못하게 하는 가공된 형식처럼 나를 마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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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의 관계는 목적을 염두에 두고 수단을 이용함으로써 구축되어서는 안 된다. 타자가 일부분 대표하는 물질적 실재가 그 관계에서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목적에 종속될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여전히 일반적으로 일어난다. 그것이 타자를 재생산의 자리로 환원하는 문제이든, 쾌락의 도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일의 도구로 환원하는 문제이든, 아니면 타자의 되기를 하나의 단일한 주체에 의해 정의된 동일성의 질서에 종속시키는 문제이든 말이다. 각 주체는 타자 앞에 멈추어 서서 타자의 환원불가능한 타자성을 존중해야 한다. 타자의 자라남에 각자가 줄 수 있는 도움은 각자가 애초의 실재에 충실한 한에서 그 실재와 되기에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 도움을 주려면 누구나 자신들의 실재에 충실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두 주체 간의 거리와 차이를 유지하게 되므로 주어진 도움이 효과적일 수 있다.
-121p

다가섬은 나와 타자의 환원불가능한 차이를 인식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사실 이를 통해 나로부터 타자에게로 가는 길에 접근할 수 있고 아직 자유로운 에너지와 공간을 공유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다. 어떤 누군가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된 것에서만 가까움은 사태이자 도래로 발생할 수 있다. 나만의 것으로 내게 속하거나 나만의 것으로 타자에게 속하지 않는 어떤 것이 생기한다. 과거에 없었지만 두 세계가 함께 모임으로써 생성된 어떤 것이 도래하여 온다. 이렇게 발생한 것은 각자가 맞아들이고 그 기억을 안전히 지킨다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그저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할 조우의 신비로운 유산으로서 간직하기 위해서.
-157p

타자와 나 사이의 갈라진 틈은 환원불가능하다. 물론 다리도 세울 수 있고 에너지를 집결하여 조우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 수도 있지만, 존재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다음에야 그 결합은 결코 결정적이지 않다. 결합은 자신 안으로 되돌아오는가 하면 멀리 떠나가며 의견을 달리하고 서로 떨어져있는 것을 포함한다. 자신의 되기에 조응하려면 타자에게 다가갔다가 떨어져나오기를 반복해야 한다. 이것을 동일성으로 환원되는 것에 대한 단순한 반대 논의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차이는 자신 안에 있는 것이든 타자와의 관계에서든 완전함을 단념할 것을 요구하며, 그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다거나 도달해야 한다는 환상을 지탱하는 그 무엇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자신과 타자에 대한 성실함은 때로 어떤 다른 것, 영원하기를 바란다든가 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축하하고 기억하는 일이 어울릴만한 그런 조우의 산물을 얻기 위해서는 무매개적인 충만함이라는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161p

이리가레를 페미니즘 이론가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사랑의 길'에서는 앞서 말했듯 페미니즘은 언급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차'라는 개념에서는 남녀의 성을 두 축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남녀 성역할, 혹은 그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추기는 개념처럼 들리기도 한다. 실제로 역자 해설에는 성차 화두로 큰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 논쟁 중에는 '성 정체성을 비롯한 성적 육체의 구성성(젠더를 말하는 듯)', '정치적 동성애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의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역자 해설에는 이에 대한 반론도 나오는데, "이리가레의 저작은 그 자체가 여성적 말하기 가능성에 대한 탐구로, 여성에게 주어진 유일한 담론일 수도 있는 기존의 담론을 여성의 입장에서 이용함으로써 남성중심적 담론이 어떻게 보편성의 이름으로 여성을 배제하는지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것.

책에도 관련한 언급이 나온다. 기존 고정관념의 의미를 남성성, 여성성 개념에서 그대로 차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성성과 여성성은 절대 서로의 역이나 대립물일 수 없다. 서로 다를 뿐(환원불가능한 차이)이다. 둘 사이에서 유지되는 이 차이가 아마도 모든 차이 중에서 가장 사유되기 힘든 것으로서의 차이 그 자체일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최근 나는 한 출입처에서 취재하는 한 기자가 하늘 말에서 설명하기 힘든 문제점을 느꼈다. 그 기자는 여성 공무원 간부 취재를 하며 여성의 리더십 장점에 대한 코멘트를 받으려고 했다. 그러면서 카리스마, 상하관계 등을 언급하며 남성적인 특성이라고 했고, 꼼꼼하고 감정을 살피고 평화로운 특성을 여성적 특성이라고, 이런 리더십이 필요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여기서 남성-여성은 서로 대립되는 특성으로 배열돼 있다. 하지만 이리가레는 차이 그 자체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남성성, 여성성을 활용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 사이에 차이를 가지고 있는 다양한 주체들에게도 차이를 인정하고 어루만짐이 필요하다는, 그리하여 지배나 전유가 아닌, "각자가 자신의 삶을 지키면서 타자의 기여를 환대하는 움직이는 전체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때가 내가 앞서 말했던 단지 처세술이 아니게 되는 지점인 듯 보인다. 다만 아직 명쾌하지는 않다.

남녀의 차이는 이미 존재하므로 우리 지성의 산물로 비유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그것을 사유하고 일구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야하지만 우선 존재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유의 기본적인 등식은 a=a가 아니라 a+b=하나가 될 수 있다. a+a가 아닌 것=전체 라고 쓸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여성성은 남성성이 아닌 것이 되거나 그 역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은 절대 서로의 역이나 대립물일 수 없다. 서로 다를 뿐이다. 그 둘사이에서 유지되는 이 차이가 아마도 모든 차이 중에서 가장 사유되기 힘든 것으로서의 차이 그 자체일 것이다. 사실 그러한 차이는 이미 사고에 의해 구성된 전체 안에서는 발생할 수 없다. 오히려 확실히 그것은 사유해야 할 것의 한 부분으로, 일종의 한계 짓는 효과로 이 전체를 지닌다. 따라서 전체가 제대로 근거지어져 있는 상태로 구성되어 있다는 믿음을 의문시함으로써가 아니라면 그것은 사유할 수 없다...
-115p

책의 막장에는 되풀이 했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설명한다. 글의 제일 끝에 붙인다.

책을 읽고나서, 이리가레의 사유로 해석해 볼 수 있는 현상이 눈에 보였다. 2017년 탄핵 촛불 집회에 함께 했던 이들 중 어떤 청년은 함께 투쟁했던 다른 청년과 한 덩어리로 퉁치는 것이 불쾌하고 잘못됐다고 하는 글을 봤다.페이스북 페이지 '후레자식 연대'에 나온 글이다. 여기서 그는, 집회 당시 가장 환멸을 느꼈던 대상이 박근혜도 아닌 바로 같이 투쟁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저열한 행동이라고 했다.

""씨발년"거리는 개저씨들, 그걸 영웅적 행위라고 생각하는 디제이 디오씨 이하늘. 성추행 일삼는 벌레들" 등등... 또한 블랙리스트를 호소하는 "예술가 양반들이 보여준 저열한 퍼포먼스와 작품"도 지적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갈등을 해소하고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성실하게 관찰하기 위한 장치"라고 주장한다.

차이를 강조하고, 민주주의가 그 차이를 관찰하기 위한 장치(검경)라고 하는 점에서 나는 이리가레의 사유와 맥이 닿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로 때아닌 홍역을 치르고 있는 성주 주민들을 보면서도 느꼈다. 현재 성주 내 사드 반대 투쟁의 방향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 이중 어느 하나의 방향으로 힘을 뭉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에서 다른 쪽의 투쟁에 대해서 잘못됐다고 지적하며 논쟁이 시작됐다. 누가 틀리고 옳다고 이야기할 입장은 못 된다. 이리가레의 사유에 도식적으로 대입하면, 서로 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가가는 '사랑의 길'이 필요하다고 할 것인데, 지금 상황에 완전히 부합하는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어딘지 양비론-훈수-꼰대의 냄새가 나는 듯도 하다. 쩝.

마지막 인용.

미리 조직된 세계의 조화는 자신에 대한 관계나 타자에 대한 관계를 지배할 수 없다. 그런 것이 생겨나려면 존재하지 않게 됨을 감수해야할 것이다. 자기 자신과 타자의 말에 귀 기울이려면 아직 순결한 장소가 필요한데, 그로부터 새로운 현존에서 나오는 말하기를 받아들이고 미래에 그것이 출현할 수 있을 비옥함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통일성과 움직임은 더 이상 동일자 안에서의 합일이 아니라, 차이가 여전히 현존의 조건이자 되기의 원천인 그런 관계로부터 나올 것이다. 과거에는 동일자 안으로의 통합의 문제였지만 이제 문제는 서로 다른 것을 인식하고, 각자가 자신의 삶을 지키면서 타자의 기여를 환대하는 움직이는 전체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고요하면서 동시에 변화해 나가는 것이 조화롭게 함께 작용하여 거주함으로써, 타성이 아닌 자신과 타자에의 충실함이 나타날 것이다. 각자는 상대편에게 한계를 정해주되 어떤 형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형식은 주체성에 고유한 세계로 다시 돌아감으로써 생겨날 것이다. 자신을 부어넣거나 자신을 맞출 틀을 바깥에서 부여하면 자신만의 형식이 피어나는 사태에 값하지 못한다. 그러한 형식의 피어남을 존중하거나 그에 도움이 되는 객관적인 지원이 분명 존재한다...그런데 무슨 연유에서 형식이 흔히 고통을 연상시키면서 그와 관련되어 왔을까? 그것은 오로지 혼자서 세계를 세우고 건설한다고 주장하는 인간의 고독과 직결된 것은 아닐까? 형식이 또한 타자로부터, 그리고 타자에 대해 느끼고 타자가 보여주는 우정으로부터도 생겨난다면 그 형식의 피어남 또한 행복이 아닐까? 완전한 전체가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한계를 받아들이는 일이 꼭 슬픔을 의미하는 걸까? 혹시 그것이 슬픔을 자아내는 이유는 단지 더없는 행복의 망각에 기초한 정신의 허식 때문은 아닐까? 또한 삶에의 충실함의 망각에 기초한. 삶을 지키고 자라나게 하는 일은 비록 규율과 포기를 요구할지라도 행복을 수반하는 것인데 말이다.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 가장 친밀한 것 안으로의 집결을 알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든 밝게 비추는 사랑의 은혜를 알지 못한다. 이는 또한 형이상학이 계발한 것과는 다른 빛의 도움을 받아 자원이 묻힌 장소, 명상적 집결의 장소를 개방한다. 진실로 그것은 제작하는 능력만큼이나 존재하도록 놓아두는 능력을 담고 있다.
-173p

생의 이면-이승우 일기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허5파6 작가의 작품 여중생A에서 이 책이 소개 됐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발견하곤 망설임 없이 샀다.

책은 독해 속도가 느린 내가 이틀에 나눠 읽을 정도로 몰입할 수 있을만큼 흡입력 있다. 결코 눈에 익은 형식으로 작품이 전개되지도 않고, 문체나 내용이 다소 무거워 읽기 쉬운 글은 아닌데도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데 있다. 이 이야기가 소설 속 인물의 이야기이자 작가의 이야기면서, 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로 나는 이 책의 어떤 향취라고 해야 할까, 잔향이라고 해야할까 할만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느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차차 다른사람과 이야기를 통해 좀더 이해해야 한다. 그들과 나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의 콤플렉스는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강박증을 낳았나?
작중 화자 '부길'과 같은 결핍감, "세상이 나 이외의 모든 것의 편"이라는 절망감, 좀더 정확히 말해 타인과의 분리 불안이 있었나. 그것은 그 시절 생에서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했나. 그리고 개인에게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쳤나?
사랑에 서툰 시절 당신의 사랑도 '부길'처럼 나르시즘적이었나? 누구나 처음은 '부길'일 수 있으되 사랑의 기술(에리히프롬-작 중 등장)을 익혀나가는 것일까?

나 스스로는 앞의 몇 개 질문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뒤의 몇 개 질문에는 짧은 순간 사랑의 실패를 통해 경험했다.

비록 내 과거를 볼 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졌다고 말하긴 어려울지라도 얼마간 아버지를 혐오한 적은 있었다. 그보다 내가 부길의 궤적을 걷는 것은 부모에게서 충분한 양분을 제공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을 갈구했고 그 사랑을 신에게서, 또는 신격화 한 내 또래 여자 아이에게서 찾았다. 감히 신은 원망하지 못했으나 (대신 나를 원망했고) 내 사랑의 대상이 된 여자아이는 원망하기 좋았다.

'부길'이 '종단'을 기다리다 '종단'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에 '종단'을 모욕하고 폭행하는 모습과 꼭 같이 나도 그들을 자주 원망했다.

이것은 나만의 경험인가? 아니면 누구나 다 겪는 일이고 거기서 배워나가는 것일까? 나는 지금 이 모습에서 얼마만큼 멀어졌나? 사실 마지막 질문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품 속 시점의 '부길'과 회상되는 '부길' 사이에는 큰 단절이 있다. 현재의 '부길'이 어떤 생각과 태도로 살아가는지, 회상되는 '부길'과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는 이야기 속에서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나아짐' 역시 확인하지 못했다. 그저 욕망과 욕구를 표출하는, 또는 제어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작가의 '문학'에 대한 견해로 볼 때, '부길'이 결국 반성, 늬우침, 용서, 자기 치유 따위를 위한 방책으로 '글쓰기'를 제안했다는 점만 알 수 있다. 관련된 이야기 중 하나다. '부길'이 신학교 기숙 학원에 들어갔을 때 신학도 3명이 있었다. A는 '학문으로서의 신학', B는 '세상 속의 신학', C는 'A와 B를 적당히 절충한 문학으로서의 신학'을 주장하며 토론을 해 나갔다. '부길'은 당시 자기는 이 모두가 아닌 '방관자'라고 생각하는데, 훗날 C에 가까웠다고 회상한다. 자기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세계였던 박제된 '종단'과 그를 통한 '신학'이 당시 '부길'의 가치였다면, '종단'과의 결별로 그 세계가 무너진 후로는 C에 가깝게 된다. 그것은 '부길'이 배운 일종의 '기술'이리라.

나역시 '기술'을 배우며 산다. 내 감정의 요동에 빠져 상대방과 괴리될 수 있음을 배웠다. 내 감정에 몰두하기만 하는 것은 시야를 좁히고 또 오판할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다. 나는 자주 주변 사람들과 앞서 말한 이유로 다퉈왔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결핍', 유년 시절의 '절망', '분리불안' 이러한 것들이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경험이라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따위의 말이 사람의 행동이나 심리를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인 단어가 되었나?

정리된 답은 없으나 잘 잊어버리는 버릇때문에 자기 전에 두서없이 적어 둔다. 이 주제로 누구라도 함께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따로 작성할 계획이다. (아직 제목의 의미를 모르겠다. 표지 디자인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최장집 일기

민주화 이후 의 민주주의: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20대 총선 앞두고 읽은 교양?서적이다. 기초지식이 부족한 편이라 어렵게 읽었다. 정치학자의 이론에 비중을 두고 설명하는 부분은 뛰어 넘기도 했다. 교양서적이라고 하기에는 이론 부분이 어렵게 다가왔다. 하지만 필자는 불필요한 부분을 장황하게 설명하지는 않고 논지도 정돈되어 있어, 내용 자체가 어려운 부분 외에는 쉽게 읽히는 편이다.

필자에 따르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보수적 민주주의다. 민주주의가 보수적이라는 말은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이념적 스펙트럼이 협소하다는 뜻으로 필자는 쓰고 있다. 자유로운 사상 추구와 표현이 어려운 상황에서 여러 계층-계급이 갖는 갈등을 정치가 대의하지 못하기때문에, 민주주의가 악화되는 상황도 지적한다. 즉, 여기서 '보수적' 민주주의는 변화가 필요한 상태를 말한다.

필자는 해방 이후부터 정치사를 언급한다. 정치의 기원을 살펴서 현재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하기 위해서다. 해방 이후 정치사는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민당, 그리고 "국가권력의 파생 정당"인 자유당 이 두 당을 모태로 한 보수 여야당의 다툼에 불과했다. 이들 정당은 특정 계급만을 대변한다.

(없는 사람은 투표도 안 하고 가진 사람, 소위 강남에 사는 사람은 투표를 철저히 하더라. 그들은 영리하고 우리는 무식하게도 투표조차 하지 않아서 문제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되곤 하는데, 온당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무산 계급이 찍을 정당이 없는 것이 문제다. 대중은 불만 표출을 원하고 상황이 개선되기를 바란다. 노무현, 그리고 아주 잠깐 반짝했던 안철수현상 등을 보면 안다. 대중과 밀접해서 자기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성과를 내는 경험을 얻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제도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대중을 끊임없이 괴리시키는 구조 역시 빼놓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해방 이후 자유당과 한민당은 그 시기의 특성상 사실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 요구를 완전히 반영하는 체계를 갖추진 않았다. 국가 권력을 잡기 위한 샅바싸움만이 중요했고, 그런 정당을 견제하거나 압박할 수 있는 장치가 없었기때문에,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 정치 행위가 아닌, 가장 쉬운 방법인 지역감정에 기대 지지 기반을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 북쪽은 혁명 세력이, 남쪽으로는 북에서 쫓겨난 유산계급이 결집한 상황도 편협한 이데올로기 형성에 역할을 했을 것이다. 특히나 진보당 탄압 등 국가도 냉전반공주의를 적극 활용해 진보적 정치세력을 제거하는데에 역할을 했다.)

이에 다양한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이 존재하지 않거나 역할할 수 없었고, 지금에도 마찬가지인 상황이 이어졌다. 

필자는 반공이데올로기(냉전반공주의)가 보수적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한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 갈등과 체제 분화와 갈등, 미소갈등 등 한국이 겪은 상황은 다른 어떤 곳보다 반공이데올로기의 강화를 낳았다. 냉전반공주의는 현재까지도 정치, 정치인, 국가, 언론, 지식인, 시민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전후 일본과 비교하는 대목도 있다. 일본의 경우 55년 체제(1955년)로 여러 이념을 가진 정당이 출현하고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는 점과 남한을 비교한다. 냉전반공주의의 정도가 덜한 일본의 경우 '공산당' 등 급진적인 이념을 표방하는 정당이 활동할 수 있고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계급 갈등을 대변하는 정당이 활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건강한 민주주의를 가진 사회라고 볼 수 있다.

보수화 된 언론 역시 중요한 문제다. 정당이 행위하기도 전에 언론은 정치의 틀을 마련하고, 이슈와 정책 아젠다를 제시한다. 대통령마저도 언론의 가이드라인에 자신의 역할을 맞춘다.(우동기 대구교육감을 보라) 이 언론을 통제할 수 있는 세력은 사실상 없다. (권언 유착, 채동욱) 거대 언론은 민주주의의 최대 위협으로 부상했다.

이후 필자는 87년 체제 이후 6공화국의 국가, 시민사회 사이에서 정치의 위치와 민주주의의 상태를 진단한다. 민주화 이전의 국가와 차이로는 행정관료와의 구분이다. 중앙 정치는 민주화 이후 개혁을 향한 국가적 열망을 등에 업으며 행정관료에 대해 우위를 갖지만, 정권 후반부로 갈 수록 국가 운영에서 이전보다 나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행정관료에게 기대는 상황이 벌어졌다. 권위주의 정권이라면 겪지 않았을 일이다.  

민주화 이후 '무능력한 국가'는 냉전반공주의라는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협애한 이념 스펙트럼도 나아지지 못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와 제벌권력의 부상이라는 문제도 더해진다. 정당의 문제도 개선되지 않고 이어졌다. 

정당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는 발전하지 않는다. 사회가 발전하지 않는 것도 이 문제 때문이라고 필자는 지적한다. 냉전반공주의는 당선-집권을 위해서는 정당이 활용해야할 영역으로 남게 됐다.(김부겸, 문재인, 김종인) 노동자, 서민은 이들이 내세우는 포퓰리즘, 당선을 위한 사탕발림에 넘어가고 실망하기를 반복하게 된다. 사실상 차이가 없는 보수 정당들의 이전투구는 정치인, 정치의 전형적인 표상이다. 정치혐오의 책임은 그래서 시민에게 돌리기 어렵다. 실제로 이들은 '안철수 현상', 최근의 필리버스터 등에서 무엇인가 기대를 걸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질 때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결국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 계층, 계급의 갈등을 제대로 대의하는 정치, 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참여, 통제권 확보가 중요한 과제로 나오게 된다.

여기에는 제도적 개선(비례대표제 등)도 필요하고, 사회적으로는 반공주의의 해소와 사상, 표현의 자유등 자유가 실현되도록 개선돼야 하며, 정당 체제도 변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언론의 변화도 필요하다. 특히,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보수독점적 양당체제를 해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노동운동 역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필자의 분석은 박근혜 정부에서 민주주의와 자유가 보장받지 못하는 여러 사례를 볼 때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또한,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 당 창당, 새누리당의 계파갈등, 민주당의 행보 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문제의식을 제공했다. 존재감 없는 진보정당의 문제와 과제도 고민해봐야 한다.
기회가 생기면 추후 포스팅으로도 남겨볼 예정이다.
참고링크: http://todayboda.net/ho/19 


발췌:
12~13p
민주주의가 한 사회에 뿌리내리고 질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발전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 교육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를 통해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 자신이 속한 사회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때 민주주의를 이해하고자 하는 지적 욕구도 커지고, 민주주의를 더 이해하게 됨에 따라 사회적 실천도 늘어나 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어떤 현실에 기초를 두고 또 어떤 이론의 안내를 받으면서 사태를 전망하는가를 반추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이를 통해 시민적 관심과 참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논의와 논쟁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좋은 논의와 논쟁은 사태를 명료하게 만들고 문제를 선명하게 부각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넓고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참여와 실천을 자극하는 민주주의의 기관차이다. 그리고 이는 사회가 지식인에게 기대하는 역할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그러한 지식인의 역할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 자리를 주류 언론의 지배적 담론과 기득 이익을 위한 수구적 논리가 대신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주류 언론이 만들고 주도하는 이슈와 의제의 틀 안에 동원된 필자일 뿐이다. 그 결과 언론은 우리 사회의 여론을 주도할 뿐만 아니라, 지식사회와 정치의 세계를 지배하는 담론의 생산자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 근본문제에 대한 발본적 비판이나 이성적 논쟁이 숨 쉴 공간은 없다.우리사회에서 언론이 생산하는 담론이란 정치를 공격하고 정치를 부정하는 것, 혹은 냉전반공주의와 오랜 권위주의가 강요한 좁은 이념적 시야에서 지극히 협소한 정치의 언어만을 조합하는데에 그친다. 우리는 매일 모든 언론의 정치관련 기사가 얼마나 천편일률적인가를 목격한다. 대안적 논의가 뒷받침되지 않는 정치비판은 의도했든 안 했든 민주주의를 말할 공간을 축소시켜 버린다. 언어가 제약된 곳에서 자유로운 생각을 갖기는 어렵다. 지배적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운 이성적인 비판과 논쟁의 장이 개척되지 않는 한 오늘의 한국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책이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서이자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를 둘러싼 지배적 담론과 해석에 대한 비판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3p
나는 한국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매우 협애한 이념적 대표체제, 사실상 보수와 극우만을 대표하는 정치적 대표체제에 있다고 본다. 내용적으로 보수독점의 정치구조는 민주화 이후에 변화되기보다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 한 사회가 이념적으로 자유롭지 못할 때, 냉전반공주의가 여전히 지배적인 정치언어로 기능하고 있을 때, 민주주의는 그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 합의 형성의 기제가 되기는 커녕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 사회의 기득구조와 특권체제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기제에 머무르게 된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가 내용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더욱 퇴보하게 된 원인은 민주화 이후 15년이 흘럿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냉전반공주의가 지배적인 이념으로 지속되고 매우 협애한 이념적 대표체제에서 보수독점의 정치구조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냉전반공주의가 지배하는 보수독점의 정치적 대표체제가 만들어 내는 사회적 결과는 많다. 직접적으로 그것은 시민과 노동계급의 이익 및 요구가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지속 시킨다. 보다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 그것은 노동을 천대하는 사회분위기를 만들고, 일에 대한 헌신이 갖는 사회적 가치를 경시하며, 따라서 부동산 투기나 제테크, 펀드관리와 같이 생산적 노동을 동반하지 않는 그야말로 돈벌이 그 자체에 우리 사회가 열병처럼 휘말리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조건에서 무엇이 정의로운 것이고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하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우리 사회에 제기한 문제의식은 쉽게 망각되고 있다.

26p
하층과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기존 정당체제에 대한 불만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정치적 대표체제의 이념적 보수성과 사회 전 영역에서 심화되고 있는 계급구조화는 하층배제적 정치동원과 짝을 이루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화 이후에도 기존 정당들은 하층과 서민에 대한 정치적 동원 및 조직화를 통해 대중정당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의 정당은 당비를 내고 일상적인 당활동에 참여하는 일반 당원이 지표상으로도 1%가 채 되지 않는 간부정당적 특성과, 이념이나 정책보다 선거에서 승리 그 자체를 목적으로하는 선거전문가정당, 모든 계층의 지지를 추구함으로써 어떤 계층이나 집단의 이해와 요구도 반영하지 않는 무색무취한 포괄정당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 정당의 이런 특성이 이념적 대표체제의 보수성과 결합될 때 정치경쟁이 어떤 사회적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가.

33p
나는 한국의 지역감정을 그야말로 비합리적 감정 그 자체로 이해하는 접근에 반대한다. 그리고 이를 영남이냐 호남이냐 하는 지역간 갈등과 대립구조로 설명하는 것에서도 반대한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지역감정 내지는 지역정서란 한국적인 중앙집중화와 이로 인한 불견형적 발전이 가져온 하나의 부수적 현상이다. 비록 지역감정이 표면적으로 어던 비합리적 감정이나 허위의식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감정을 부추기는 정치적 선동은 그런 기반이 잇기 때문에 위력을 발한다.
중요한 것은 지역감정의 정치가 서울로의 초집중화 및 그에 따른 지방의 배제라는 갈등구조에 기인한 것임에도 갈등의 정치적 분획선은 중앙 대 지방의 차원에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지방 대 지방의 대립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초집중화의 문제를 지역간 갈등으로 환치시킨 힘은 다시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성에 있다. 정치적 대표체제의 이념적 협애성, 계층적, 이념적 기반을 갖지 않는 정당 조직, 보수독점적 엘리트 과두체제, 냉전 기득 세력의 강한 헤게모니 등과 같은 정치 사회적 조건에서 정치경쟁은 국가권력의 소유권을 둘러싼 단차원적 갈등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이때 경쟁의 편을 가르는 구분선은 지연, 학연과 같은 엘리트 구성의 일차적 특성에 따른 것이 되기 마련이다. 사실 지역감정의 대립은 중앙 엘리트 사이의 권력을 둘러싼 경쟁의 산물일 뿐, 그것이 영남과 호남의 지역민이 갖는 문화적 특성이나 어떤 사회경제적 이해관게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감정의 극복을 위해서도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 요소들이 정치 엘리트의 이해관게에 따라 전용되고 왜곡되도록 하는 보수독점적 정당체제의 구조변화가 중요하다. 내가 끊임없이 이념적 대표체제의 협애성을 문제삼는 것은 어떤 진보적 변화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니다.

36p
정치는 정당에 의해 주도되기 이전에 언론에 의해 틀이 짜인다. 정책 아젠다와 이슈를 설정하는 것도 언론이다. 대통령에서부터 국회의원, 장과에서부터 정치참모와 고급관료의 일이란 심하게 말하면 언론의 보도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맞춰 가는 것이다. 기껏 이들이 내리는 결정이란 언론이 그 결정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예상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만큼 정부의 업적, 정당의 업적, 정치인과 관료 개개인의 업적을 평가하는 언론의 정치적 기능은 막강하다고 할 수 잇다. 뿐만아니라 언론은 준사법적 기능을 한다. 정치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의 도덕성과 불법성에 대한 판단은 언론에서 먼저 내려진다. 정당과 의회 자체의 정화기능이나 검찰과 사법부의 결정은 그 이후의 일이며, 대체로 그것은 사건을 정리하는 단계에서의 절차일 뿐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언론은 한 개인의 정신과 내면의 영역까지 임의적으로 개입하고 판단하여  '좌파'니, '사상이 의심'스러우니 하는 일제식민체제나 전체주의체제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사상검증'을 자유롭게 해 댄다.
이 엄청난 권력을 가진 언론은 누가 통제하나. 정당과 정부는 주기적인 대중 직접선거를 통해 그가 한 행위의 업적을 평가받고 책임을 추궁한다. 그 결과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통해 획득한 신임은 이들 정치조직들의 공적 권력행사의 정당한 근거가 된다. 그에 반해 언론의 영향력은 국가를 능가할 정도가 되었지만, 언론에 대한 시민적 통제의 여러 시도들은 이른바 '언론의 자유'를 마치 천부인권처럼 들먹이는 거대 언론 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19세기 민주주의에서 의견의 자유를 의미하는 언론의 자유와, 오늘날 이미 대기업화되고 거대한 사적 권력으로 커진 언론기업들이 이야기하는 언론의 자유는 동일시될 수 없다.

37p
현대 민주주의의 최대 위험은 대기업화 된 거대 언론이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에서 여론은 다수의 의견이 자유롭게 소통되고 합리적으로 설득될 수 잇는 역역이어야하지만, 언로닝 거대 기업화될 경우 이들은 여론시장을 독점시장의 논리로 지배하려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언론의 문제는 세계적 경향을 반영하는 정도를 넘어선다. 비록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언론의 거대 기업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이들의 언론시장은 복수의 의견, 복수의 정치적 경향, 복수의 이념적 지향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의 여론시장은 매우 동질적인 정치적, 이념적 지향을 갖는 몇개의 대기업 신문사가 독점하고 있다. 매우 동질적인 이념적, 정치적 지향을 갖는 언론대기업에 의해 여론시장이 독점되어 있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는 없다.
한국의 신문구독시장은 소비자인 언론수용자의 선호와 요구에 반응적이지 않다. 신문구독시장의 불공정거래 관행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시장논리에 대한 주류 언론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정작 신문구독시장은 전혀 자유경쟁시장이 아니다. 독점시장이다. 이런 조건에서 신문의 구독률 분포를 곧 시민의 선호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허구다. 독점적 여론 시장은 개혁돼야 한다. 의견의 자유로움, 정신적 사유의 자유로움이 제약될 때 자유시민은 없다.

69-70p
헤게모니 정당으로서 자민당은 전일적으로 통합된 정당이 아니라 5개 또는 8개로 구분될 수 있는 파벌의 연합체로서, 이들이 각기 지배블럭 내에서 갈등적인 이익을 대변하고 이들간의 타협을 통해 컨센서스를 형상하는 방법으로 사회 갈등을 통합한다. 55년체제 전반기에 자민당 내 파벌은 정책적 차이를 대변하는 '정당 속의 정당' 역할을 할 수 잇었고 한 파벌로부터 다른 파벌로의 권력 이동은 정권 교체와 유사한 성격을 갖는 것이다. 자민당의 장기집권은 보수일당 지배체제라고 비판받아왔다. 상당정도 진실이다. 중요한 것은 일본사회에서 자민당 지배는 절차적 정당성에 기초할 뿐 아니라 헤게모니를 가졌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에서 완전히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선거와 정당간 경쟁을 통해 지배적 정당의 지위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디 팔마 G. Di Palma는 "정치게임에 있어, 공개적으로 극단적 정당임을 천명하는 정당까지 최대한 포괄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자민당의 형성 자체가 이러한 경쟁의 결과물이다. 일본에서도 한국과 같이 협애한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에서 보수적 정당만이 정치경쟁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면 같은 보수정당이지만 구체적으로 대외 정책노선이 달랐던 히토야마 이치로의 민주당과 요시다 시게루의 자유당이 자민당이라는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해 55년체제를 만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과 한민당처럼 보수 독점적 양당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격렬한 정치경쟁의 관계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동일한 냉전 조건에서도 정치경쟁의 이념적 범위가 얼마나 개방적이고 자유로웠는가에 따라 매우 다른 정치적 결과를 만들게 된다.

130p
지역문제를 지역간 감정의 대립으로 인식하는 것은 허위의식, 곧이데올로기다. 지역문제의 본질인 호남문제는 세 구성요소가 있다. 하나는 유신체제에서 구각와 민간부문의 엘리트 충원에 있어서의 호남배제, 둘째는 지역소외를 해소해 줄 지도자로서의 김대중 씨와 호남민 사이의 강한 유대 형성, 셋째는 광주항쟁으로 인한 억압의 집단적 경험이다. 선거에서 지역간 경쟁 구도는 1987년 민주화와 더불어 선거공간이 개방되었을 때 야당과 민주화운동이 단일 전선으로 통합되는 것을 제어하고 분열시키기 위한 권위주의 세력의 사회적 동원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민주적 개방 이후의 지배적 정당체제로서 지역정당체제는 냉전반공체제가 주형한 대표체제의 한 결과다. 왜냐하면 사회의 다른 직능적, 계층적 갈등과 이익, 열정이 표출되고 동원될 수 있는 정치적 경쟁이 어려운 상태에서, 지역의 지지시장은 정치 엘리트와 정당이 목전에 당도한 선거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었던 가장 손쉬운 정치적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지역정당체제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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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로 인한 국가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국가를 두 수준으로 나누어봐야 한다. 하나는 하부구조적 수준에서 국가다. 보통 국가를 '항상적으로 제도화된 역할체계'라고 말할 때 그것은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구현하는 방대한 관료기구와 이를 운용하는 국가기구의 관리자로서의 인적 집단을 말한다. 베버가 말하듯이, 그것은 비인격적, 비개인적 충원, 공적 목표, 역할, 업적평가의 체계를 갖는 대규모 공조직으로서 관료행정적 형태로 제도화된 체제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정부적 수준에서의 국가다. 정부는 초헌법적 힘의 사용을 통해서든 경쟁적인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적 방식으로든 권력을 획득하고 특정 형태의 방법으로 권력을 행사하며 국가기구를 운영하는 일단의 정치 세력을 말한다. 다른말로, 권력의 획득과 행사 과정에서 사회적 지지를 조직하고 동원하고자 하는 특정의 이념적 정향 내지는 정책적 정향을 갖는 사람들에 운영되는 국가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권위주의 하에서 이 두 수준은 융합되어있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국가의 이 두 수준이 분리됐다. 이는 곧 선출된 집권 정치 엘리트와 행정관료 엘리트 사이에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관계설정이 필요하게 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권위주의에서는 집권 정치엘리트가 행정관료 엘리트에 대해 확실한 힘의 우위에 선다. 군부 엘리트는 근대적 행정관료 엘리트 집단 자체를 창출했고 그들이 수행할 확실한 국가목표를 제시했다. 군부 엘리트는 제벌조차 관료적 결정에 종속시킴으로써 재벌을 비롯한 사회의 제 압력으로부터 관료의 자율성을 의미하는 국가자율성을 확립했다. 민주주의 하에서 이러한 관계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노태우 정부의 경우 민주선거를 통해 선출됐지만 집권 엘리트 구성에서 구체제와 다를 게 없었다.
김영삼, 김대중 두 정부는 모두 민주화 운동에서 표출됐다. 집권후기로 들어가며 대통령의 업무수행에 대한 평가는 하락했고 통치하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정치엘리트와 행정관료 간의 관계 역시 변했다. 집권 초기 정치엘리트는 행정관로ㅛ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가졌다. 권위주의와 일체화되었던 행정관료들이 도덕적 우위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집권 초기를 경과하면서 정치 엘리트들은 국정운영에서 무능함을 드러냈다. 관료엘리트의 도움 없이 국정운영 자체가 어렵게 됐다.
그 때문에 행정관료 엘리트의 권력은 권위주의 시기보다 더 커지게 됐다. 그 결과 권위주의와 다를 바 없이 사회의 요구와 의견이 광범위하게 연계될 수 없는 협애한 이슈 영역 내에서 폐쇄적인 정책결정방식이 지배적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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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한 국가를 능력있는 국가로 만들 것인가의 문제가 민주화 이후 사회발전에서 핵심적 문제다. 무력한 국가가 등장하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 냉전방공주의라는 지배적 이념을 정권의 핵심적 가치정향으로 삼고 이를 바탕으로 보수적 기득 이익의 지지를 받는 것이 헤게모니를 얻는 방법이다. 한 정부가 어떤 정향을 가지든, 우리사회의 보수 기득 이익의 가치정향을 수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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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위수투표자를 냉전반공주의와 발전주의를 지지하는 보수성향의 유권자로 전제한다. 중요 선거에서 이른바 개혁적 후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보수성향의 유권자에게 어필하려 했다. 누군가 이런 방법으로 대선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보수적 기득세력이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보수화 된 다음에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냉전반공주의를 과도하게 의식한 과거의 야당과 그 후보는 선거 경쟁에서 이념적 정체성과 정책적 비전을 선명하게 제시하기보다는 의식적으로 이른바 전략적 모호함의 태도를 취해왔다. 따라서 선거경쟁은 유권자가 정당에게 이념적, 정책적 지향을 위임하고 구속하는 절차로서 의미를 갖제 못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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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서 대통령제가 권위주의로 흐를 수 있는 윟머성은, 정치문화나 정치전통이 권위주의적이거나 가부장적인 요소가 강할 때, 그리고 이러한 정치문화가 강력하게 중앙집중화된 국가권력을 갖거나 사회적으로 다원주의의 저발전이라는 구조적 특성과 결합할 때 매우 커질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강한 권위주의적 유산을 갖는다고 할 때 그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한국의 경우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는 순간부터 급변하는 지위와 그가 놓이게 되는 물리적 환경의 변화에 압도된다.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정부의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업무가 시작됨과 동시에, 시민과 공중으로부터 신체적으로 분리된다. 누구보다도 먼저 국가의 안보, 정보기구의 장들은 여러 기밀사항에 대해 당선자에게 체계적으로 보고할 것이다. 그 뒤를 고위공직자가 이을 것이다. 이 과정은 대통령이 겪게 될, 지위에 맞게 생각의 구조를바꾸는 것의 시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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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제왕적이라고 주장하는 논거로 다음과 같은 요소가 지적된다. 조선 시대의 군왕과 같은 존재로 견제없는 절대권력을 향유한다는 것, 국가권력을 사유화하고 그렇기 때문에 부패한다는 것, 위임민주주의처럼 선출한 유권자에 대한 책임성으로부터 벗어나 비상조치를 남발하면서 군림한다는 것, 위로부터 대중을 동원하는 포퓰리스트적 선동정치를 통하여 카리스마적으로 중우정치를 주도한다는 것, 공익을 대표해야 할 국가의 수반이 정당의 총재직을 유지함으로써 정당의 리더로서 공익을 파당적 이익에 종속시킨다는 것 등이다. 따라서 이러한 '최악의 지배형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권력을 단순히 분할하고 제한하는 것으로는 안 되고, 'ceo대통령'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한다는 주장이 있다
ceo대통령 논리에는 근본적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의 근본원리와 상충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한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영역 가운데서 경제로부터 정치의 분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사익을 추구하는 시장과 1인 1표라는 보통선거권의 평등성에 기초한 민주주의 작동원리는 다르다.
ceo 대통령 논의는 신주유주의 내지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한 산물이다.
이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시장지향적이고 국제자본지향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에 대해 부정적이고 반정치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는 부패했다, 정치란 비합리적이다, 정부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덩어리다 라는 식의 신자유주의논리와 맞닿아 있다. 나아가 이러한 논리는 적극적인 노동시장정책을 펴고 사회복지를 확장하거나 사회정책을 강화하는 한편 시장의 불평등 효과와 자본의 영향력을 통제하려는 국가 또는 정부의 노력에 대해 반대한다. 이러한 반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은 정치의 존립근거를 없애려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자체에 매우 위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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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 행태, 비선 혹은 측근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데서 오는 국정의 난맥이라든가, '아들 부패' 같은 현상, 권력의 사유화 현상으로 드러나는 사인주의적 요소 등의 문제점은 차라리 부차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대통령이 민주적이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대통령을 권위주의적이게 만드는 것은 그의 말과 직무 그리고 정책공약에 대해 그를 지지해 준 투표자들에게 책임을 지지 않고 구속되지 않는 상황의 결과물이다. 대통령은 국가와 시민사회, 정부와 투표자를 매개하고 그들을 대표하는, 그리고 그들에게 책임을 지는 정당의 리더인 동시에 국가 최고 행정수반이다. 대통령이 권위주의적이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당의 허약함 때문이다. 대통령이 정당의 수장으로서 정당을 사유물처럼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대통령이 권위주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당이 약하기 때문이다. 정당이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권력의 연원이 그 기반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둘러싼 문제의 중심에 정당이 있고, 그 때문에 얽힌 인과의 고리를 풀어가는데 있어 정당과 정당체제를 민주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 된다. 오늘의 한국 정당체제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정당과 사회가 멀다는 것이다. 즉 정당을 사회의 갈등에 뿌리내려야 한다.
냉전 반공주의가 한국의 정당체제를 이념적으로 협애한 틀에 가두어 놓았다. 갈등이 대표될 수 있는 여지를 극히 좁혀놓았다는 것이다. 1950년대 이래 냉전반공주의의 헤게모니는 갈등 그 자체의 표면화를 어렵게 만들고 무조건 통합하자는 식의 갈등부재 담론을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정치는 갈등의 존재와 그 때문에 분열되어있는 사회를 전제로 경쟁과 타협을 통해 갈등을 민주적으로 표출하고 정당을 매개로 이를 민주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이며, 그 효과가 사회의 통합을 가져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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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 민주화. 강한 냉전반공주의 이데올로기, 재벌이 지배하는 경제, 거대한 국가관료제 등 권위주의에 친화적인 사회구조 혹은 민주화를 허용할 것 같지 않은 조건에서 민주화는 이루어졌다. 조숙한 민주주의, 운동에 의한 민주화, 협약에 의한 민주화다. 민주화 계기로 시민사회의 폭발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대중동원이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아래로부터의 대중동원은 조숙한 민주주의로 나타났고, 1987년 6월항쟁은 6.29선언으로부터 시작된 협약에 의한 민주화로 이어졌다.
조숙한 민주주의는 냉전반공주의와 짝을 이룬다. 매우 협애한 이념적 대표체제 위에서 거대한 두 개의 당이 중심이 되는 보수독점적 정당체제를 주조했다. 지난 50년동안 정당의 명칭은 수도 없이 바뀌었지만, 크게 보면 조숙한 민주주의하에서 형성된 보수양당제의 구조는 지속됐다. 하나의 정당이 권위주의 국가가 만들어낸 일종의 파생정당이라면, 다른 하나는 해방공간에서 지주의 이익을 대변했던 한민당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보수정당인다. 한민당에 기원을 둔 이들 보수정당은 권위주의하에서 만년 야당의 위치에 있었기에 흔히 보수야당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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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서 사회적 합의는 만장일치가 아니다. 여러 대안들의 경쟁을 통해 다수 의사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그 결과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도 사회적 합의라는 말을 많이 썼지만, 그 사회적 합의란 정부가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권위주의 정부는 대개 경제발전과 같은 거시적 성과를 통해 사후적으로 정당성의 취약함을 보완하면서 사회적 갈등을 억압하고자 했다. ..정당이 제 역할을 다 못할 때 민주주의는 제대로 발전할 수 없거나 위기에 처한다. 그 결과 사회가 질적으로 발전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는 결국 정당체제의 저발전에 그 원인이 있다. 확실히 보수적 민주주의가 갖는 문제들은 정당체제의 위기를 통해 표출되고 있다. 한국의 정당체제가 구시대의 이념적 틀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냉전반공주의에 기반을 둔 정당체제는 서민과 노동의 배제를 특징으로 한다. 한사회의 중심 집단의 이해와 요구를 배제할 경우 정당체제의 편협성은 강화된다. 그 결과 정당체제와 사회 간의 괴리가 증대할 수밖에 없고, 정치가 사회의 중심 이슈와 갈등을 포괄하지 못함으로써 정치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이 확대되는 것이다. 투표참여는 줄고 정당이 정치계급의 살롱이 됨에 따라, 정치는 기득 이익의 안정적 유지를 보장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고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않는 서민층이나 노동이 정치과정으로 들어와야 한다. 정치 엘리트들은 늘 사회 통합을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균열과 갈등이 표출되고 동원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통합이란 사회적 갈등과 균열이 경쟁하는 복수의 정당을 통해 표출되고 대표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조건에서만 민주주의는 갈등이 만들어내는 사회분열을 완화하고 해소할 수 있는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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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되지 않은 유권자는 노무현 현상이나 정몽준 현상에서 볼 수 있듯 뭔가 변화의 가능성이 나타날 때 그 존재를 드러낸다. 한국의 정당체제는 이들의 요구를 대표할 수 있도록 변해야 한다. 기존 보수 편향적 대표 범위가 대폭 확장되어야 한다. 기존 정당이 현재의 위치에 안주할 때 정당체제의 불안정은 계속될 것이다. 투표 거부 또한 확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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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민주주의가 대중권력으로 기능하려면 유권자의 투표행위가 정치 엘리트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유권자 개인의 투표가 정치 엘리트로 하여금 책임성을 갖게 만드는 제도적 효과가 있어야 한다.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대표의 범위가 넓어야 한다. 즉 다양한 갈등과 균열이 정치적으로 표출되고 조직되는 것이 억압되지 않아야 한다. 둘째는 선거제도가 유권자 개개인의 자유로운 선호의 표출을 억압하지 않아야 한다. 예컨대 한 유권자가 A라는 정당을 지지하는 동시에 C라는 정당의 집권을 피하고자 하는 두 개의 선호를 갖고 있을 때, C당이 집권할 수 있다는 위험 때문에 결국 B정당을 찍게 된다면 유권자의 선호가 충분히 실현된 것이 아니다. 셋째는 개개인이 어떤 정당을 지지하든 모든 투표의 가치가 동등해야 한다. 유권자의 투표가 정당의 의석수에 균등하게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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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당체제는 가장 나쁜 조건을 갖고있다. 국보법과 같이 비민주적 법적 제약이 아직도 건재하며, 시장의 규율에도 통제되지 않는 무소불위의 보수언론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조건에서 사회적 갈등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조직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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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주주의의 발전은 기존 보수독점적 양당체제를 해체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현재와 같은 국회의원 선거제도도 바뀌어야 한다. 그 방향은 비례대표제의 성격을 강화해야 하는 것이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정당투표를 통한 비례대표제에 기반을 두면서도 규모가 작은 지역구에서 유권자가 후보자와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게 유지시킴으로서 정치 엘리트의 수직적 책임성을 강화시킨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양대 보수정당 중심의 독점적 구조를 유지시키는 단순다수제를 비례대표제의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노동운동도 이 문제에 지금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치의 발견-박상훈 일기

20대 총선을 앞두고 정당 정치의 기본 개념을 알아보기 위해 몇 권의 책을 꼽았다.

<정치의 발견>-박상훈(후마니타스)은 정치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기 보다는 정당 정치에 뛰어들고자 하는 진보 정당 정치인(정치인이 되려는 진보주의자)을 대상으로 한 조언을 모은 책이다. 이는 부제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에서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필자는 청자를 정치 혐오, 혹은 정치에 몸담는 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이들, 혹은 진보를 이야기하면서도 '책임윤리'(막스베버)없이 이념만 추구하는 이들이라고 설정한 듯 하다.

필자는 이 책의 주된 메시지를 막스베버의 개념을 차용해 설명한다. 
  • 막스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책임윤리'와 '신념윤리' 개념을 주장했다. 정치인에게는 '윤리'가 필요하다. 막스베버를 모르지만, 이 책의 맥락으로 보자면 막스베버는 정치의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인치'이기 때문에 '좋은' 정치인이 '옳은' 정치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듯 하다. 정치인에게 '윤리'가 필요한 이유는 정치인이 국가를 통치하기 때문이다. 국가를 통치한다는 것은 강제력(폭력)을 행사하는 것이고, 윤리적인 정치인이 올바른 통치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치의 이상향이라고 본다. 책임윤리란 내가 이해하기로, 정치인이 발딛고 있는 현실에서 비정치인들을 설득하고 리더십, 전망을 보이는 등의 활동을 포함한 '현실적-실질적' 행위를 비정치인의 언어로 '잘'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말이다. '신념윤리'는 정치인이 비전-신념을 가져야 한다고(특히 민주주의에 대해서) 강조하는 말이다.
필자는 정치인이라면 신념윤리를 강조하면서 책임윤리에는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고 청자에게 말한다. 책임윤리 부재가 진보 정치인의 전형적인 약점이라고 한다. 신념윤리만 앞세우는 사례로 인상 깊었던 대목이 있다.
"마르크스 경제학자로 잘 알려진 대학교수의 비정규직 관련 강연 내용을 소개하면서, 내게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그 강연의 요지는 "비정규직의 근원은 자본주의에 있다. 자본주의가 있는 한 비정규직 문제는 피할 수 없다. 문제는 자본주의다. 비정규직의 고통을 완화하려는 제도 개선 투쟁을 해 봐야 별것 없다. 자본주의 철폐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내 대답은 이랬다. 이런 종류의 좌파들은 체제에 모든 책임을 돌리고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래봐야 자본주의만 정당화 해 준다며 개혁을 부정하는 사람도 가끔 본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늘 타인의 고통을 필요로 한다. 대중이 더 고통스럽고 박해받아야만 자신과 같은 좌파들의 존재가 빛난다는 사실을 그들은 무의식중에 드러낼 때가 많은데, 참으로 곤란한 일이 아닌가 한다.

19세기 자본주의 폐혜가 드러날 당시 유럽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신념윤리만 앞세우고 현실 정치에는 소홀하자 파시즘 세력에게 정치를 넘겨줬다고 작가는 본다. 마르크스주의자는 경제적 모순 심화>계급 갈등 심화> 노동자의 자각> 혁명의 단계를 거칠 것이라고 역사를 도식적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실 정치의 기회들을 잡지 않았고, 파시즘에게 그 기회를 넘겨줬다고 한다. (필자는 이를 '유물사관'이라고 하지만, 내가 알기로 사적 유물론이란 단계적 발전론을 말하는 건 아니고 역사 전환이 생산관계'계급의 변화에 따라 바뀌어왔다는 말이다. 
당시 마르크스 주의자들이 혁명에 도식적으로 일관했다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인지도르겠다. 

그러면서 필자는 청자에게 이런 저런 태도, 마인드를 제안한다. 특별히 내가 기억할 만한 대목은 아니다. 그 외 기억나는 두 가지 대목은 정치의 핵심이 '좋은 통치자'를 만드는 것이라고 보는 점과, 법치주의에 대한 필자의 견해이다.

"대한민국은 법치주의 국가인데" "법치주의 국가에서~"라는 말은 일상적 대화에도 자주 나오는데, 그 법치주의라는 말이 절대선인 것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필자는 법의 보수성, 법의 민중지양성을 주장한다. 법이 권한을 가질 수록 민중에게는 좋지 않다는 말이다. 또한,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주의 체제에도 결국 민중은 괴리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 때문에 민주적 정치에서 다뤄야할 갈등을 사법권에서 다루는 경향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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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읽은 책이지만, 언론의 방향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했다. 언론 역시 대중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정치와 유사한 지점이 많다. 기성 언론은 기성 이데올로기를 '신념윤리'로 두고 그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한다. 기성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는 점에서 기성 언론은 이미 대중적이다. 문제는 기성 언론이 아닌 다른 '신념윤리'를 가진 언론에서 어떻게 언론 활동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다. 어떤 '신념윤리'를 가지되, 대중적인 언어로, 대중의 시각에서 언론활동을 해야 한다. 기성언론보다도 영향력이 있어야 비주류 이데올로기도 먹힐 것이 아닌가. 그저 기성언론이 비판하지 않는 것들을 비판하기만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변화를 지향하지 않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필요로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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